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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발틱

코카서스 발틱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9-29 11:05
조회
1348

                                                                                                       아제르바이잔 [ Azerbaijan ]


• 수 도 : 바쿠(Baku)• 종족구성 : 아제르바이잔인 (90%), 다게스탄인
               (3%) 러시아인 (2.5%),아르메니아인 (2%, )

• 공용어 : 아제르바이잔어

• 종교 : 이슬람교 (93.4%), 러시아정교 (2.5%),아르메니아 정교 (2.3%)

• 건국일 : 1991년 8월 30일

• 통 화 : 마나트(Manat)


카프카스 동부, 카스피해 서부 연안에 있는 국가. 정식명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Republic of Azerbaijan)이다.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분리 독립했다. 북쪽으로 러시아연방의 다게스탄 자치공화국, 서북쪽으로 조지아(그루지야), 서쪽으로 아르메니아, 남쪽으로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동쪽으로는 카스피 해(海)에 면해 있는 국가로서 1922년 구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의 하나로 편입되었으나 1936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1988년부터 아르메니아인(人)이 많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지역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으로 영토의 20%가 아르메니아에 넘어 갔다. 1990년 12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으로 개칭한 후 1991년 10월 공식적으로 독립하였다.                                                                                                                                                                                                        

 바쿠 Baku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카스피 해 서해안의 아프셰론 반도 남해안에 있으며, 바쿠라는 지명은 페르시아어의 ‘바트쿠베’ 즉 ‘산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구릉 경사면에는 잘 정돈된 도로와 위압적인 건물들이 늘어서고 해안에는 아름다운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중세에는 아제르바이잔인(人)의 교역도시로서 번영하였으며, 요새(13세기), 시르반샤 궁전(15세기) 등이 남아 있다. 18세기에는 바쿠칸의 거성(居城)이 되었으며, 1806년에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1920년 9월에는 볼셰비키 국제공산당(Communist International)대회가 바쿠에서 열렸는데 중동피압박민족대회라는 이름으로 열렸으며 이 대회를 통해 공산주의의 국제적 확대를 시도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바쿠 유전에 외국자본이 투입되고 개발이 시작되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으며(1997년:11만 2천), 1989년 소련 붕괴에 앞서 주권을 선언한 신생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바쿠 유전 [ Baku oil field ]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海) 서해안에 있는 유전으로서, 아프셰론 반도와 그 근방에 분포해 있으며, 중부 ·상부 플라이오세(世)에 속하는 함유층(含油層)의 두께는 1,000∼3,400m이다. 석유는 양질이며, 벤진 함유량이 많고 황화물의 함유량은 0.1% 이하로 적다. 유정(油井)이 비교적 깊기 때문에 채유비(採油費)가 비싸며, 채유량의 약 65%가 해저유전에서 산출된다. 산유의 대부분은 송유관으로 바투미에 보내지며, 일부는 카스피 해와 볼가 강을 거슬러 운송된다. 바쿠와 바투미에는 제유소가 있다. 아프셰론 반도의 유징(油徵)은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개발은 187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1873년에 첫 분출이 있었다. 1913년에는 770만 톤으로 그 75%는 외국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소련시대에 많은 유정을 굴착하였으며, 특히 아르촘 섬 부근의 카스피해저 유전이 유명하다.

바쿠 올드시티 [ Baku Old City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 중심부에 있는 역사도시로, 7세기부터 12세기에 형성되었다. 차리 샤하르(Ichari Shahar) 로도 불리며,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지역[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 지정되었다.

7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점차적으로 형성된 도시로, 대표적 유적지로는 7세기에 건립된 일부 구조물과 11세기에 건립된 시니그 갈라 사원 첨탑[Synyg Gala Minaret], 11세기-12세기 사이에 건립된 요새 벽과 탑, 15세기에 건립된 메이든 탑 [Maiden Tower], 물타니 쉼터[Multani Caravanserai] 및 하지 가입 목욕탕[Hajji Gayyib bathhouse], 15-16세기에 건립된 쉬르반샤 궁전[Palace of the Shirvanshah], 16세기에 건립된 부카라 쉼터[Bukhara Caravanserai] 및 가심바이 목욕탕[Gasimbey bathhouse] 등이 있다. 이외의 명소로는 중고서적을 많이 파는 지역 서점, 2차 세계대전 중 드골이 머물러‘샤를 드골 하우스(Charles de Gaulle House)’로도 알려져 있는 하친스키 궁전[Hajinski’s Palace]이 있다. 2000년 12월 쉬르반샤 궁전 및 메이든 탑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 지구목록에 등재되었다. 이곳은 아제르바이잔의 지폐인 10 마나트에 그려져 있다.

이곳에는 살란 문[Salyan Gates], 셰마카 문[Shemakha Gates], 1877년 세워진 타기예프 문[Taghiyev Gate] 등 여러 개의 출입문이 있으며, 도시방어를 목적으로 한 대포 수십 개가 벽에 설치되어 있다. 러시아의 점령으로 올드 시티의 전통적인 구조양식이 변화했고, 19세기와 20세기 초 사이에는 바로크양식과 고딕양식의 유럽형 건물들이 세워졌다. 2008년 바히드 공원 재건공사 중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대 지하도로가 발굴되기도 했다.

 

메이든 탑 [Maiden Tower]
바쿠 내 올드 시티에 있는 고대 탑으로, 12세기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둥근 타원형 모양으로, 12세기 바쿠 성곽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설립되었다고 추정된다.

조로아스터교도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아랍인들, 페르시아인들, 터키인들,러시아인들 사이에 문화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증명해 주는 역사적인 탑이다.
쉬르반샤 궁전 [ Shirvanshah Palace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위치하며 15세기 시르반 샤호프칸 일족에 의해 지어진 궁전. 15세기 건축물인 쉬르반샤 궁전은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가치가 높다.

궁전은 왕궁·회의장·목욕탕·기도실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밖에도 11세기 시니크칼라 사원, 8각형의 홀로 지어진 디반칸 법원, 드주마메체트 첨탑 등이 있다. 2000년엔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아테시가배화교사원 [The Ateshga Zoraosrian Fire Temple]
아제르바이젠 배화교 사원 중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20km수라카니(Suarakhani)에 있는 아테시가 사원이다. 천연가스유정 위에 세워진 나지막한 탑 꼭대기의 네 귀에서 영원의불을 밝히고 있는 사원이다. 수라카니는 한때 인도인들이 성지 순례로 찾던 곳이 었으나 1880년에 천연가스가 고갈되면서 순례가 끊어진 곳이다.
고부스탄 [ Gobustan ]
바쿠 남쪽 65km 지점에 있는 사막건조기후의 사암(沙巖)지대로, 기원전 8세기 전 선사시대 사람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기원전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와 매장되어 있는 가스로 인해 진흙이 분출하는 진흙화산이 대표적 명소다. 석유, 천연가스 등의 자원이 풍부하며, 지명은 돌을 뜻하는 고부[gobi]와 땅을 뜻하는 스탄[stan]이 합성된 ‘바위지역’에서 유래했다.
마라자 마을의 디리바바 무덤


고부스탄 근교 마라자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1402년 건립된디리바바(Diri Baba)의 묘가 있다.

디리바바는 이란의 이슬람 수피파 성자로, 그가 행한 기적으로 인해 ‘살아있는 할아버지[Living Grandfather]’로 불린다



                                                                                                 조지아 [Georgia, Republic of Georgia]


• 국가 : 그루지아, Gruziya (조지아 Georgia)
• 면적 : 6만 9700㎢

• 수도 : 트빌리시

• 정치 : 의회형태 공화제, 대통령 중심제, 단원제

• 화폐단위 : 라리(Lari, GEL)

• 언어 : 조지아어

• 종교 : 조지아 정교, 이슬람교, 아르메니아사도 교

[개 요]

아시아 흑해 연안에 있는 공화국.

국토의 3분의 2가 산악지대이며, 평야지대에는 목축과 포도재배가 매우 성하다. 강우량은 많은 편이며 기온 차가 심하다. 석탄과 철광석, 원유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중공업이 발달되어 있고 발전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 역사 ]

기원전 3세기 카틀리 왕국으로 출발한 이 나라는 1936년 소연방 구성공화국으로 발족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하여 왔다. 조지아 인들은 타마라 여왕시대(1184∼1213)에 최전성기를 이룩하였으며, 이때 카프카즈지방에서 최강의 국력을 누렸다. 철학과 과학이 발달하였으며, 건축과 예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도 이 시대였다.1386∼1403년 몽고의 티무르에 의하여 8차례나 침공을 당하여 국력이 크게 쇠잔되었으나, 1453년 오스만터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장악으로 조지아는 서유럽과 직접 관계를 수립, 15세기 말까지 통일국가를 유지시켜 왔다. 16세기 초 조지아 인들은 터키와 사파비 이란과의 전투에 휘말렸고, 오랜 전쟁 끝인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독립을 되찾았다.

그러나 1783년 러시아와 보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795년 이란군의 침입을 받게 된 이후 러시아제국에 병합되었다. 1918년 5월 공화국이 수립되고 유럽 국가들과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22개국의 승인을 얻었으나, 1922년 12월 소연방에 편입되었고, 1936년 12월 소연방구성공화국으로 되었다.

1989년 11월 조지아최고회의는 소연방 탈퇴를 결정하였고, 1990년 11월 14일 주권을 선언, 1991년 4월 9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당시에는 독립국가 연합에 참여를 원하였으나 인권탄압을 이유로 거부당해 오다가 1993년 12월 9일 독립국가연합의 1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나 2009년 6월 의회에서 탈퇴를 의결하여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1995년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남부 오세티아의 소수민족이 독립을 선언하여 민족분규에 시달리고 있다. 2004년 1월 취임한 사카쉬빌리(Mihail Saakashvilli) 대통령이 정부를 이끌고 있으며, 대외정책은 우경중립의 외교를 펴고 있으며,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트빌리시 [ Tbilisi ]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 대카프카스산맥 남쪽 기슭의 해발고도 500m의 구릉과 쿠라강 계곡에 시가지가 위치한다.

옛 이름은 티플리스(Tiflis)이며, 대(大) 코카서스 산맥 남쪽 기슭의 해발고도 500m의 구릉과 쿠라강(江) 계곡에 시가지가 위치한다. BC 400년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4세기에는 성채도시, 11세기에는 조지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자카프카지예 지방의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자주 싸움터가 되었으며, 1922∼1936년 자카프카지예 연방의 수도가 되었다. 지하철이 각 구(區)를 연결하며, 철도 ·도로 교통의 요지로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다.

트빌리시 올드 타운 [Tbilisi Old Town]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있는 구시가지이다. 양 옆으로 므츠바리(Mtkvari) 강이 흐른다. 고풍스런 옛 건물이 많아 올드 트빌리시(Old Tbilisi)로도 불리며, 현대식 빌딩이 늘어서 있는 트빌리시의 신(新)시가지과 대조를 이룬다. 고대 도시로서의 가치가 높고, 기독교 건축양식의 사조를 알 수 있는 유적들이 많아 트빌리시 역사지구[Tbilisi Historic District]로 지정되었다. 19세기의 절충형 도시 구조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으로, 5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건축 구조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메테히 정교회 [Metekhi Church]
트빌리시에 있는 그루지아 정교 교회로, 5세기 경에 건축되었으며 스탈린이 투옥되기도 했다.

5세기경 바흐탕 골가사리 1세(King Vakhtang I Gorgasali)가 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새를 지으며 함께 지은 교회가 모체(母體)이다. 12세기에 붙여진 메테히라는 이름은 ‘왕궁 주위에 있는 지역’을 뜻하는 말이다.


텔라비


텔라비(조지아어: თელავი)는 조지아(그루지야) 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카헤티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21,800명(2002년 기준)이다.

청동기 시대 유적이 남아 있으며 8세기부터 이 지역의 중심 도시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카헤티 왕국의 수도로 남아 있었고 15세기 통일 조지아(그루지야) 왕국이 분열되기 전까지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된다. 17세기 카헤티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18세기 동 조지아(동 그루지야) 지방에 세워진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트빌리시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지만 1801년 러시아 제국에 정복되고 만다.

무츠헤타 [ Mrskheta ]

무츠헤타는 그루지아 동부 카르트리(Kartli) 주에 있으며 트빌리시에서 북쪽으로 20km지점, 아라가리(Aragari) 강과 므츠바리 (Mtkvari) 강의 합류점에 있는 인구 2만여 명의 옛 왕도이다.기원전 1000년 경 기원한 도시로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존속했던 이베리아 (Iberia)왕국의 조지 왕국의 수도였으며 그리스도교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6세기 초 바크탕 1세 고르가살리(Vakhtang I Georgasali : 452~502)의 후계자인 다르치 1세 우자멜 리가 수도를 티발리시로 천도하였다.

무츠헤타 외곽에는 기원전 3~1세기 경의 성곽이 남아있고, 기원 전 1세기 로마 황제 폼페이우스(Pompeious Magnus : BC 106~ BC 48)의 돌다리도 남아 있어 페르시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즈바리 수도원 [ Jvari Monastery ]


6세기 조지왕국 치하에 아라가리(Aragari) 강과 므츠바리(Mtkvari) 강의 절벽 산상에 세워진 그루지아에서 가장 오래된그루지아 정교회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즈발리’는 십자가를 뜻하며 이름에 걸맞게 수도원은 평면상 십자가 모양이다.
아나누리 요새 [ Ananuri Forteress ]


티빌리시에서 그루지아 군사도로를 향해 가다 므츠바리 강 4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아나누리는 13세기 아라그비의 에리차스비 대공의 성채로 건축되었으며 2007년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되었다. 안에 있는 교회는 1689년 바르젬 대공의 아들에 의해 축조되었다.


카즈베기 Kazbegi


카즈베기는 그루지아에서는 스테판스민다(Stepantsminda)라고 불리운다.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카즈베기 산이 유명하다. 마을 이름이 스테판스민다가 된 것은 이곳에 그루지아 정교회 사제 스테판이 그루지아 군사도로(Georgian Military Highway)에 외딴 암자를 지운 후이다.

카즈베기 산은 높이 5,047m로 그루지아어(語)로 '얼음 산'을 뜻한다. 코카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봉 중 하나이다. 흑해에서 카스피 해까지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은 코카서스 산맥 중앙부에 있으며, 두꺼운 빙하로 뒤덮인 성층화산이다. 200㎞ 서쪽으로 코카서스 산맥에서 가장 높은 엘브루스산(5,633m)이 펼쳐져 있다.



고리 [ Gori ]


그루지아 고리 구(區)의 행정 중심도시이며, 수도 트빌리시 북서쪽 76㎞ 지점에 있으며 철도의 분기점이다. 쿠라 강과 리어프비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휴양도시로 7세기 초에 톤티오라는 이름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시로 승격된 것은 1801년이다. 고리란 조지아어(語)로 ‘산’을 뜻한다고 한다.

이곳은 1917년 혁명 전에는 행정·상업 중심지인 작은 마을이었다. 옛 소련의 정치가 I.V.스탈린의 출생지인데, 그가 태어난 집은 현재 기념 박물관이 되어 있다. 역사·민족박물관 등 오래 된 도시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많다. 시내의 중앙부에 있는 산 위에는 중세의 요새인 고리스치의 폐허가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 [ Republic of Armenia, Armenia ] 

• 별칭 : 아르메니아공화국, Republic of Armenia
• 면적 : 2만 9800㎢

• 수도 : 예레반

• 정치·의회형태 : 대통령 중심제, 공화제, 단원제

• 화폐단위 : 드람(Dram, AMD)

• 언어 : 아르메니아어

• 종교 : 아르메니아정교, 기독교, 조로아스타교

[ 개 요 ]

정식 명칭은 아르메니아공화국(Republic of Armenia)으로,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한 공화국의 하나이다. 면적은 2만 9800㎢, 인구는 296만 8586명(2008년 현재), 수도는 예레반(Yerevan)이다.

주민은 아르메니아인 97.9%, 쿠르드인 1.3%, 러시아인 0.5%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아르메니아어이며, 종교는 아르메니아정교 94.%, 기독교 4%, 조로아스터교 등 기타 2%이다.

고산지대에는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으며, 아락스 계곡과 예레반 주변지대에는 목화와 포도·올리브 등 과수업이 성하다. 또한, 구리·아연·알루미늄 등이 풍부하여 광공업도 발달되어 있는 편이다.

[ 약 사 ]

최초로 통일된 아르메니아는 아타시드왕조(기원전 191∼190)였으며, 그 뒤 아사시드왕조에게 넘어가 428년까지 존속하였다. 아사시드왕조 때 아르메니아어가 공용어로 되었으며, 301년 아사시드의 트리다테스 3세 때에는 성 그레고리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 뒤 1080년부터 1375년까지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 간의 완충국으로 독립을 유지하였을 뿐, 셀주크터키·오토만터키·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서유럽 강국들이 오토만제국의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아르메니아에는 최초의 정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아르메니칸(1885)·힌차크(1887)·다치나크(1890) 등의 정당들이 그것인데,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어 러시아로부터 지침을 받았다.



1894년 힌차크당 주도 하에 폭동이 일어나자 터키인들은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그 이듬해까지 약 30만 명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으며, 그들의 탄압은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아르메니아인들 중 일부는 터키 군에 소속되어 러시아에 맞서 싸운 반면, 일부는 러시아로 들어가 제정 군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또 한 차례 터키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어 150만 명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되었다.

브레스트·리토브스크(Brest-Litovsk) 조약 체결로 카프카즈지역 일부가 터키 수중에 다시 들어갔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항거하여 1918년 5월 28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승전국들이 다시 아르메니아를 터키에게 양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다치나크당은 모스크바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1920년 12월 2일 예레반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후일 소련구성공화국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후일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고르바초프 정권에 가장 먼저 도전한 민족은 오히려 반러시아적이기보다 반터키적 성향이 짙은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자치주 귀속문제로 처음에는 모스크바 정부보다는 터키인의 피가 섞인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분노하였으나, 종파는 다르나 같은 회교도들인 중앙아시아 모슬렘민족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 하에 연방정부가 취한 미지근한 태도는 결국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반소·반러 적 불만을 터뜨리게 하였다.

마침내, 1991년 9월 21일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다. 1994년 5월 아제르바이잔과 휴전 합의하였으나 긴장은 여전히 고조되어 있다. 1995년 7월 5일 헌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예레반 [ Yerevan ]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코카서스 산맥의 남부 고원(900∼1,300m)에 있으며, 라즈단 강을 끼고 있다. 남쪽에는 아라크스 강의 넓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아라라트 산이 있으며, 북쪽에도 산들이 둘러서 있다. 이 도시는 7세기부터 문헌에 나타나고, 8세기에는 돌로 지은 요새가 있었다. 1826∼28년에는 러시아령이 되었다가 1920년에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세반 호(湖)의 수력전기를 이용한전기기계·알루미늄야금·카바이드·합성고무·폴리비닐아세테이트·전구·시계·공작기계 등의 공업지대가 남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밖에 코냑·통조림(과일·고기) 등의 식품가공 공장도 많다. 과학 아카데미, 국립대학을 비롯한 10개 이상의 고등교육·연구기관, 역사박물관, 마테나다란 고문서관 등이 있으며 북쪽의 언덕에는 승리공원이 있다.

예레반 공화국 광장 박물관 [ History Museum of Armenia ]


예레반 공화국 광장에 있는 역사박물관으로, 1919년 9월 9일 의회법 439항에 의해 설립되었다. 아르메니아 민족학 협회[Armenian Ethnographical Association]에 간직되어 있던 소장품들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약 100만년 전 선사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아르메니아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이집트, 미타니, 히타이트 왕국,아시리아, 이란, 로마 등 아르메니아 고원 동쪽에 있는 국가들과 상호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어 그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학살 위령탑
아르메니아 학살 위령탑은 예레반 서북쪽 산에 위치해 있다.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 Geonocide)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거주했던 소수 민족이자 변두리에서 거주했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 인들을 다수의 무슬림이 학살한 사건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터키정부의 아르메니아 인 강제이주가 시행되면서 약 100 ~ 150 만명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세반호 Sevan L. , ─湖


면적은 1,420km2이다.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산지에 있는 아르메니아 최대의 호수이다. 호수의 북서쪽 끝에서 라잔 강 (江)이 발원한다. 세반 ·라잔 수계(水系)는 아르메니아의 유력한 수력전원(水力電源)지대로 5개의 수력발전소가 있다. 이 호수에 사는 세반송어는 명산물의 하나이다.



가르니 [ Garni ]


아르메니아 공화국 에레반의 동방 27km 거리에 위치한 고대 아르메니아의 성채와 도시로, B.C. 2세기에 축조되어 아르메니아 왕들의 거처였다. 성채 안에는 현무암조(造)의 신전(1세기)이 있었는데,이것은 24주(柱)의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을 두른 페리스틸륨이 있는 건물들로, 18X13m의 기단 위에 서 있었다. 17세기에 지진으로 인하여 붕괴되었다가 현재 복원되어 있다. 1949년부터의 발굴로 1~3세기 장원(莊園)의 대광실,2층 주택건물, 테티스(바다의 여신)를 그린 모자이크 바닥의 욕장 등이 발견되었고, 네 개의 아프시스가 달린 원형의 기독교성당(7세기)도 있었다.

게하르트 수도원 [Geghard Monastry]


가르니(Garni) 계곡 아자트 밸리(Azat Valley) 위쪽 절벽산허리에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 전체 건물은 4세기경그레고리(Gregory)가 신성 샘이 있던 동굴을 파서 만든것이며, 교회 본당만 1215년에 건립되었다.중세를대표하는 독특한 복합 건축물이며, 사원 복합건물 안의교회들 중 일부는 아자계곡의 절벽 바위를 깎아 만든 교회혹은 동굴 안에 만든 교회, 건축학적으로 벽을 쌓아 만든 교회, 절벽 안 깊은 곳에 만든 교회 등 그 형태가 각양각색인 것이 특징이다.2000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에치미아진 [ Echmiadzin ]

1945년까지는 바가르샤파트(Vagarshapat)라고 일컬어졌다. 예레반에서 서쪽으로 33㎞ 지점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종교 중심지이다. BC 7세기 무렵 바르트케사반이라는 마을로 시작되었다. 140년 무렵 파르티아의 왕 볼로가세스 3세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바가르샤파트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300년 무렵에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뒤 총대주교관구가 설치되었다.

344년 수도가 바뀌고 453년 총대주교관구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나 1441년 총대주교 키라코스에 의하여 다시 총대주교관구가 설치되었다. 주변에 비옥한 농업지대가 펼쳐져 있어 여러 가지 과일과 야채가 생산되며 플라스틱공장·포도주양조장·통조림 생산공장 등이 있다.

대주교 성 그레고리우스가 신비로운 이적(異蹟)을 체험하고 건립하였다는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7세기에 창건되었고 15세기 중반에 개축, 보수되었다. 이곳에는 대주교구청이 있으며 그레고리우스의 손 성해가 보관되어 있다. 부속된 돔 양식 성당은 세계 그리스도교 건축물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

에치미아진 성당 [ Echmiadzin Cathedral ]


아르메니아 그레고리 정교회의 본산(本山)이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301-303년에 성 그레고리[SaintGregory]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아르메니아 성당 최초로 합법적 공인을 받은 성당이다.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의 사모창과 노아의 방주에서떼어 왔다는 돌판 위의 십자가가 소장되어 있다. 고대 건축의 정수이자 기독교 건축양식의 원형으로 꼽히며, 성당 건축발달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2000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 목록[UNESCO World Heritage Sites]에 등재되어 있다.


                                                                                        에스토니아(Estonia)


․ 국 명 : 에스토니아공화국
․ 면 적 : 45,200평방km

․ 인 구 : 150만

․ 수 도 : 탈린(Tallinn – 인구 443,000)

․ 인 종 : 에스토니아인(62%), 러시아인(30%), 우크라이나인(3%)

․ 언 어 : 에스토니아어

․ 종 교 : 기독교23%(루터교 및 러시아정교)

․ 정 체 : 독립공화국


[지리 및 기후]

에스토니아는 발틱 국가들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작은 나라로 면적은 스위스와 비슷하다. 동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국경을 이룬다. 서쪽에는 발틱 해와 리가 만(Gulf of Riga)이 있고, 북쪽에는 핀란드만이 있다. 핀란드만을 건너 80km지점에 헬싱키가 있다. 북서해안에 위치한 수도 탈린(Tallinn)의 서쪽320km에 상페테스부르그가 있다. 국토는 비교적 평평하지만 남동부에 있는 317m 높이의 제일 높은 산 수우르 무나매키(Suur Munamägi)에서 힘들지 않고 많은 곳을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국경지역에 있는 페이푸스(Peipus)호수는 3500평방km로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크다. 에스토니아 전국토의 10%가 섬이다. 가장 큰 섬은 사아레마아(Saaremaa)와 히이우마아(Hiiumaa)로 둘 다 서부해안에 있다. 국토의 절반은 산림이며, 약4분의1은 습지대인데 일부 토탄습지는 깊이가 6m나 된다.에스토니아에는1470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토착식물이 있는 한편, 동물들 가운데는 노루와 엘크를 포함한 커다란 유럽포유동물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또 10가지의 희귀보호 양서류가 있다. 황금독수리(250쌍), 꼬리가 긴 독수리, 점박이독수리, 수리부엉이 등과 같은 수많은 맹금류들이 보호받고 있으며, 희귀종인 검은 황새도 있다. 에스토니아 산속의 가장 특이한 구경거리는 유럽산 날다람쥐이다. 기후는 대륙에 접하고 있어 차고 습하며,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해안보다 겨울에는 몇 도 정도 기온이 낮고 여름에는 약간 더 덥다. 겨울은 매섭게 춥다. 히이우마아와 사아레마아 섬을 둘러싼 바다는 1월 중순쯤 얼어붙어 나라 전체가 눈으로 덮여 있는 약 3개월 동안은 녹지 않는다. 비는 9월에 가장 많이 내리고 봄에 가장 적게 온다.

[역 사]

국가정체성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세기에 걸친 투쟁은 에스토니아 역사의 상징이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적어도 BC 7500년부터이지만 현재 거주민의 조상은 아마도 BC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들어온 피노–우그리아족(Finno-Ugric)의 수렵인 들이었다. 이 지역이 방치되었다가 역사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3세기의 식민지 개척자이자 무역상이었던 게르만 왕자의 동으로 향하는 열망에 의해서였고, 그 후 에스토니아는 곧 외부세력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어두운 역사는 7세기 동안 이어진다. 독립국가로 부상하려는 투쟁은 1920년 에스토니아 국회와 영구적인 독립을 인정한다는 소련과의 평화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성취되는 듯하였다.그러나 기세가 오르던 소련과 팽창주의자 나치독일이 걸림돌이 되었고, 에스토니아는 1934년 수상 콘스탄틴 패츠(Konstantin Päts)가 독재정권을 잡아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빠져든다.1939년 나치와 소련 간의 불가침협약에서 비밀리에 에스토니아를 소련의 영향권에 넣었고 소련정부는 국가주의화와 숙청을 단행하여 6만 명의 에스토니아 인을 조사하여 학살, 이주 또는 추방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일부 에스토니아 인들은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고, 발틱 국가들을 점령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를 해방자로 잘못 알게 된다. 에스토니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약 40만 명을 잃었고 독립을 다시 상실했다. 1944년 소련의 재점령으로 집단 농업화와 수 천 명의 에스토니아 인을 학살하고 강제 이주시키는 스탈린시대가 시작 된다. 에스토니아는 수 십년에 걸친 소련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유를 갈구한다. 1980년대 말 소련지도자 미카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그들의 희망과 일치하는 주장을 하였고, 그간의 울분과 민족정서가 합쳐져 자치를 요구하는 대규모의 집회가 이어졌다. 1988년 수많은 사람들이 에스토니아에 모여 전에 금지되었던 민족가요 중의 하나인 해방의 노래를 부른다. 30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탈린집회에 참가하여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소연방 최고위원회는 독립선포를 통과시키고, 1989년8월, 2백만이 모여 탈린부터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까지 인간 사슬을 만들어 분리탈퇴를 주장하였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천명한 후, 다음달 UN에 가입하고 새롭게 형성된 민족의 자주독립을 확고하게 다지기 시작한다.

[경 제]

국내총생산 : US$ 93억4천, 인당 국내총생산 : US$ 6450             연성장률 : 10%, 인플레이션 : 11.2%

주요산업 : 식품, 의류, 혈암류, 금속, 목공                                      주요무역상대국 : 핀란드, 스웨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문 화]

계절의 변화, 농토, 가족문화, 사랑, 신화 등을 소재로 하는 구전 노래, 시, 찬가들이 풍부한 전통의 덕택으로 수 세기동안의 외세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의 토착 민속 문화는 존속하였다. BC 천 년으로 거슬러가는 가장 오래된 에스토니아의 노래형식은 8음절의 멜로디를 기본으로 주제가 단계적으로 전개되는 고대 북유럽 룬의 멜로디이다. 에스토니아 현대문학은 19세기 초 시인 크리스티얀 야아크 페터르손(Kristjan Jaak Peterson)과 함께 시작한다. 민족서사시 칼레비포에그(Kalevipoeg)(칼레프의 아들)는19세기 중반 프레드리히 레인홀드 크레우츠발드(Freidrich Reinhold Kreutzwald)에 의해 쓰여 졌다. 20세기 에스토니아 문학의 거장, 소설가 안톤 한센 탐마사아레(Anton Hansen Tammsaare)가 있다. 최근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소설가 얀 쿠로스(Jan Kross)와 시인 야안 카플린스키(Jaan Kaplinski)가 있다.에스토니아어는 핀란드어처럼 핀노–우그리아어이고,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 등과는 별개의 언어이다. 에스토니아어는 깊은 소리 오---, 우---가 많은 북 유럽어와 상당히 유사하다. 주요 종교는 루터교와 러시아정교이지만,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에스토니아인은 소수이다. 훈제생선 특히 민물송어(suitsukala)는 에스토니아의 특별음식이고, 소시지가 나올 때 채식주의자 보다는 흡혈귀를 위한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철에는 신선한 돼지의 피와 내장으로 싼 소시지를 만든다. 선지소시지(verevorst)와 선지팬케이크(vere pannkoogid)는 대부분의 에스토니아 전통식당에서 먹어 볼 수 있다. 시럽같은 바나탈린 술 (Vana Tallinn liqueur)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할 정도로 달고, 매우 강하지만, 에스토니아식단의 기본이다. 커피와 아주 잘 어울리며, 만일 견딜 수 있으면 우유나 샴페인에 띄운 얼음 위에 얹어 먹을 수 있다. 가장 좋은 에스토니아 맥주는 약한 사쿠(Saku)맥주와 사아레마아 섬에서 만든 약간 강한 사아레(Saare)맥주가 있고, 향신료를 가미해서 따뜻하게 마시는 와인(hõõgvein)을 카페나 바에서 마실 수 있다.

                                                                                                                탈린 TALIN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 유럽 어느 곳도 중세풍의 성벽과 건물위로 돌출한 탑, 뾰족한 교회첨탑, 꼬불꼬불하며 자갈로 포장된 거리 등이 뒤섞인 탈린의 구시가 만큼 14, 15세기의 분위기를 잘 간직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매우 현대화되어 헬싱키의 교외라 불린다 탈린 중심에 있는 토옴페아(Toompea)언덕은 여행객들이 꼭 보아야 할 곳이다. 19세기 러시아정교의 알렉산드르 네브스키(Alexandr Nevsky)성당이 있으며, 에스토니아 의회 리이키코쿠(Riigikogu)의 집회장소인 토옴페아성이있다.그리고 1233년에 세워진 루터교성당 토옴키리크(Toomkirik), 그 가까이는18세기 귀족의 저택에 세워진 에스토니아 미술박물관, 1475년경에 높고 견고하게 세워진 탑 키에크-인-테-셰크(Kiek-in-de-Kök) 등이 있다.탈린 구시가지 동쪽 약 2km에 있는 카드리오르그(Kadriorg)는 오크, 라일락, 마로니에 나무들로 우거진 쾌적한 공원이다.바로크양식의 카드리오르그궁전과 함께 이탈리아인 니콜로 미케티(Niccolo Michetti)에 의해 러시아황제 피터대제를 위해 설계되었다. 이 궁전은 1718년에서 1736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피터대제 자신이 벽돌을 3장 쌓기도 했다. 궁전 뒤에는 피터대제가 건축당시 거처했던 조그만 오두막집이 있는데 지금은 피터대제 개인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탈린에는 숙박시설이 많기는 하지만 여름에는 호스텔일지라도 미리 예약해야한다. 구 시가에 있는 라에코야 광장(Raekoja Plats :Town Hall Square)에는 탈린의 식당과 카페들이 몰려있다. 여름에는 라에코야 광장 전체가 가벼운 스낵, 핫도그, 전통적인 코틀레트(kotlett), 사쿠맥주 등을 파는 임시 노천카페로 붐빈다. 또한 구 시가지에 한창 성업중인 나이트클럽이 많이 들어서 있다.



                                                                                         리투아니아(Lithuania)


․ 국 명 : 리투아니아공화국
․ 면 적 : 65,200평방km

․ 인 구 : 370만

․ 수 도 : 빌니우스(인구 575,000)

․ 인 종 : 리투아니아인(80%), 러시아인(9%), 폴란드인(7%)

․ 언 어 : 리투아니아어

․ 종 교 : 로만카톨릭이 전반적으로 우세, 러시아정교,  구종교 (Old Believers), 루터교

․ 정 체 : 독립공화국


리투아니아는 반체제 조각상뿐만 아니라 1990-1991년의 독립을 향한 용감하고도 격정적인 운동으로 잘 알려졌듯이 발틱국가 중에서 가장 활기에 찬 나라이다. 리투아니아는 한때 이웃나라 폴란드와 함께 발틱해에서 거의 흑해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듯이 중부유럽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이웃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인들 보다 훨씬 외향적이고 덜 조직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틱 이웃나라와 다르게 여전히 로만카톨릭을 따르고 있다. 비록 나라가 작고 장엄한 풍광은 없지만 리투아니아는 흥미로운 큐로니안 모래톱(Curonian Spit)과 흔치 않은 십자가언덕(Hill of Crosses)과 함께, 유서 깊고 활기찬 수도 빌니우스(Vilnius)가 지닌 도시의 즐거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자랑하고 있다.

[지리 및 기후]

리투아니아는 발틱 국가들 중 가장 큰 나라로 크기가 아일랜드와 거의 비슷하다. 북으로는 라트비아, 남동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의 발트해, 남서쪽으로는 폴란드와 잘려진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는 대부분 평평한 지형이며, 제일 높은 지역인 유아자피네스(Juazapines)가 294m에 불과하다. 리투아니아의 발틱해안은 약 100km인데, 그 반은 연필같이 가느다랗고 높이 66m에 이르는 독특한 큐로니안 모래톱으로 이루어져 있다. 리투아니아의 4분의 1이상은 삼림지대이며 주로 남서부에 있다. 엘크, 사슴, 야생돼지, 늑대, 살쾡이 등이 숲에 살고 있지만 안내원 없이는 이런 동물들을 구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리투아니아에는 약 2000마리의 수달이 살고 있고, 남쪽에 있는 주빈타스(Zuvintas)호수는 물새의 중요한 부화장소이자 쉼터이다. 리투아니아에는 5개의 국립공원이 있고, 자연보호구역이 많다. 높은 모래언덕, 소나무숲, 모래사장, 산호초, 해변 등의 독특한 환경을 지닌 쿠르시우 네리야(Kursiu Nerija) 국립공원이 가장 유명하다. 리투아니아의 기후는 온화하다. 5월에서 9월의 최고 낮기온이 섭씨14도에서 22도이고, 11월에서 3월은 거의 영상 4도 이하이다. 7월과 8월은 가장 덥고 습기가 많고 지속적으로 소나기가 내린다. 5월, 6월 그리고 9월은 훨씬 쾌적하지만 6월말은 천둥이 치는 경우가 있다. 가을에 눈이 왔다가 녹은 다음이나 겨울에 쌓였던 눈이 봄에 녹을 때, 발이 진창에 빠지는 일은 흔한 일이다.

[역 사]

현대 리투아니아인의 조상은 발트족(Balts)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2000년 남동쪽에서 온 것으로 추정한다. 12세기경 발트인들은 모두 자연종교를 신봉하는 부족그룹으로 나누어졌다. 리투아니아에서 두 주요그룹은 서부의 사모기티안(Samogitians)족과 동부의 아우크스타이티아이(Aukstaitiai)족이다. 리투아니아 남서쪽과 폴란드의 인접지역에는 훗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인으로 동화된 또 다른 발트족인 요트빈기안스(Yotvingians)족이 살고있었다.13세기 중엽 아우크스타이티아이족의 지도자 민다우가스(Mindaugas)가 짧은 기간이지만 카톨릭 분위기에서 리투아니아종족들을 통일하였다. 이교도 왕자들이 반격하였지만, 1290년 대공이 된 기독교인 뷔테니스(Vytenis)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1316년에서 1341년까지 대공이었던 그의 동생 게디미나스(Gediminas)는 초기 러시아국가의 쇠퇴를 틈타서 리투아니아의 국경을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였다. 게디미나스의 손자, 요가일라(Jogaila)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1386년에 폴란드의 왕위계승공주와 결혼하여 400년간 두 나라의 유대를 강화한다. 1387년 아우크스타이티아이족은 세례를 받고, 1413년에는 사모기티안스족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기독교국가가 되었다. 1569년 루브린조약(Treaty of Lublin)에서 두 나라의 공식적인 연합이 이루어진 후 16세기말까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아우국가로 전락했다. 리투아니아 상류계급은 폴란드 문화와 언어를 사용했으며, 농민들은 농노가 되었으며 연합국가는 연방국가의 형태(Rzeczpospolita)가 되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이반황제(Ivan the Terrible)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리보니아(오늘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558년 최초로 이반이 침입하여 25년간의 리보니아전쟁이 시작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그리고 이후 스웨덴이 이반과 그 추종자들을 몰아 내는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1592년 이들이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고 카톨릭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개신교 스웨덴이 발틱지역에 정착한 다음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스웨덴이 승리하여 에스토니아와 오늘날 대부분의 라트비아지역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간의 분쟁은 계속되고 러시아가 연방을 침략하여 상당 부분의 영토를 합병하였다. 17세기 프러시아에 의해 더욱 약화된 연방은 마침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에 의해 멋대로 분할되어 리투아니아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리투아니아는 19세기 러시아에 대항하는 폴란드의 반역에 두 번 가담하여 농민들은 1861년까지 자유를 얻지 못하였다. 1864년부터 러시아는 카톨릭교인들을 박해했으며, 러시아문자를 사용했을 때에만 리투아니아어로 책이 발행될 수 있었고 폴란드어로 된 책들은 출판이 금지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점령했으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리투아니아공화국정부가 수립되었다.하지만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폴란드군대는 1919년 빌니우스를 침입하여, 1920년대에 3개월을 제외하고는 1939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점령한다. 1920년 소비에트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평화협정에 조인한다. 리투아니아는 1926년 군사쿠데타를 치르고, 1929년부터 이탈리아 뭇솔리니와 유사한 정책을 펴는 안타나스 스메토나(Antanas Smetona)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1939년 8월 23일 나치독일과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나치독일의 권역에 두는 몰로토프-리벤트롭(Molotov-Ribbentrop)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리투아니아는 나치의 폴란드침략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여 다시 소련의 영향하로 편입된다. 1939년 10월 소련 붉은 군단이 동부 폴란드를 침입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빌니우스를 되찾는다. 동시에 독일은 서부 폴란드를 침입한다. 1940년 8월부터 리투아니아는 소비에트군부의 지배를 받고 공산주의자들이 정부를 구성하고 소련연방(USSR)공화국의 하나가 된다. 1941년 히틀러가 침공하여 거의 모든 유태인들이 나치점령기간동안 캠프나 게토에서 학살당했다. 소련군이 1944년 말 다시 점령하여 리투아니아가 주권을 회복하기위한 첫걸음을 시작하는 1980년 까지 지배한다.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개방(glasnost)과 개혁(perestroika)정책의 직접적인 결과로, 운동이라는 뜻의 사유디스(Sajudis)라 불리우는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단체가 결성된다. 리투아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위한 발틱지역의 운동을 선도한다. 사유디스는 1989년 3월 소련연방 인민회의의 리투아니아지역선거에서 42석 중 30석을 석권하고, 그 해 12월 리투아니아공산당은 소련연방의 공산당과 결별한다. 이러한 시도는 소련연방의 해체의 징후가 되었고 특히 리투아니아는 공산당이 아닌 당을 합법화하는 최초의 소비에트공화국이 되었다. 1990년 2월 사유디스는 리투아니아 상원 소비에트의 다수당이 되고 3월 11일 의회는 리투아니아가 독립공화국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소련은 몇 주간 위협적인 군사행동과 경제봉쇄로 응답한다. 사유디스의 지도자 뷔타우타스 란드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는 리투아니아와 소련정부간의 독립에 관한 대화에서 100일간의 독립선언 유예기간을 둘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강경파의 부상으로 소련군대는 빌니우스의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텔레비젼 송신탑과 본부 점거시 13명의 사람이 죽는다. 마침내 서방세계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며 1991년 9월 6일 소련도 독립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1991년 9월 17일 리투아니아는 유엔에 가입하고 되찾은 국가독립의 기쁨을 즐기기 시작한다. 1998년 성인시절 대부분을 시카고에서 미국환경보호단체의 고위 정책전문가로 일하던 리투아니아 이주민 발다스 아담쿠스(Valdas Adamkus)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경 제]

국내총생산 : US$ 154억           일인당 국내총생산 : US$ 4230           연성장률 : 6%          인플레이션 : 8.6%

주요산업 : 제조업, 금융업, 농업, 임업, 건설업                                       주요무역상대국 : 러시아, 독일, 벨라루스,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문 화]

리투아니아는 발틱 3국 중 인종적으로 가장 단일한 국가이다. 현대 리투아니아인들은 발트족의 후손이며, 19세기와 20세기초 정치 및 경제적인 이유와 2차 세계대전으로 발틱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해외이민자가 있다. 체계적이고 계산적이라기보다 사교와 친절을 중시하는 리투아니아인들의 전형적인 성격은 사교성이 있고 친근하며 감성적이다. 냉정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인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성미가 급하며 예측할 수 없다고 평한다. 리투아니아인과 발틱 이웃국가들의 차이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기의 독립운동에서 잘 나타났다. 리투아니아에서의 투쟁은 감성적이고, 용감무쌍했으며, 때로는 절박하고 위험하였다. 결과적으로 2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 반면 에스토니아에서는 점진적이고 잘 계산된 무혈투쟁이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다 죽은 다음에야 독립을 얻기 위해 죽을 것이다.’라는 불명예스러운 말을 들었다. 리투아니아어는 인도-유럽어의 발틱어족 가운데 남아있는 두중 하나이다. 로리투아니아어(Low Lithuanian)는 서부에서 사용되며 나머지 지역에서 사용되는 하이리투아니아어(High Lithuanian)의 사투리이다.카톨릭교회는 리투아니아사회의 보수세력이며, 카우나스(Kaunas)의 대주교가 그 수장이다. 러시아정교의 신자들도 일부 있고, 17세기이래 간헐적인 박해를 받아온 러시아정교의 분파인 구신자(Old Believers)들도 있다. 빌니우스, 카우나스, 해외 리투아니아 교민들을 신도로 하는 로무바 운동(Romuva movement)이라 불리는 이교도도 있다. 이것은 리투아니아의 고대정신과 민속전통으로 복고하기 위한 운동이다.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은 18세기 농노의 생활을 묘사한 크리스티요나스 도넬라이티스(Kristijonas Donelaitis)의 계절이라는 뜻인 메타이(Metai)라는 시이다. 마이로니스 (Maironis)로 유명한 요나스 마치우리스(Jonas Maciulis)는 20세기 초에 쓴 그의 시로 현대 리투아니아 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리투아니아는 또한 몇몇 주요 폴란드작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그 중에 198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체슬라브 밀로즈 (Czeslaw Milosz)가 있다.흥미로운 전통민속예술으로는 교차로, 공동묘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마을광장등에 세우는 키 큰 기둥 위에 커다란 나무십자가, 태양, 풍향계, 성인상 등의 조각품들이 있다. 소비에트시절에 이러한 것들은 금지되었지만, 시아우리아이(Siauliai) 부근의 십자가언덕(Hill of Crosses)에 놀랍게도 남아있다.낙농제품과 감자는 리투아니아식단의 기본음식이며, 팬케이크는 특별히 인기가 있다. 잊혀질 수 없는 전통음식인 걸쭉한(감자반죽이라는) 비행선모양의 덩어리에 치즈, 고기, 버섯 등을 안에 채운 체펠리나이(cepelinai)이다. 체펠리나이는 위에 양파, 버터, 신크림, 베이컨 조각 등으로 만든 소스를 얹져서 제공된다. 사코이티스(Sakotis)는 주로 결혼식 때 먹는 것으로 키 큰 크리스마스트리모양의 케이크이다. 크리스마스정찬 때에는 12가지의 채식요리를 즐긴다. 우테노스(Utenos)와 칼나필리스(Kalnapilis)는 이 지역 최고의 맥주이며, 아마도 60도의 미더스(midus:꿀술)보다 나을 것이다. 언제 잠들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꿀로 만든 술인 스타클리스케스(stakliskes)를 찾아야 할 것이다.

                                                                                                             빌리우스  VILNIUS

리투아니아의 수도는 많은 리투아니아 해외이주민과 중부유럽과 그 북부지역의 영향으로 국제적인 분위기이다. 16세기에 동부 유럽의 대도시였던 빌니우스는 폴란드의 17세기 ‘황금기’에 한 몫을 했으며, 19세기에는 유태인 도시로 중요하였다. 독일, 폴란드, 러시아 모두 20세기에 빌니우스를 차지한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사람과 유태인들은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빌니우스는 리투아니아 독립투쟁의 본거지가 되었다. 특히 1991년 소련군들이 사태를 반전시키려고 텔레비전방송국을 공격했을 때, 13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낸 극적이고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빌니우스는 발틱해에서 내륙으로 250km떨어져 네리스(Neris)강 기슭에 있다. 리투아니아의 남동쪽에 있으며 벨라루스와의 국경에서 아주 가깝다. 시내 중심가는 강의 남쪽에 있으며, 성당광장(Cathedral Square)이 그 종심지이다. 광장 북쪽에 성당이 있고 그 뒤에 게디미나스 언덕(Gediminas Hill)이 솟아있다. 동부 유럽에서 제일 큰 구 시가지는 성당광장에서 남쪽으로 펼쳐져 있다. 구불구불한 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교회의 첨탑과 가려진 안뜰이 있는 셀 수없이 많은 교회들을 찾아 다니는 것이 흥미롭다. 상징적인 건물들은 빌니우스대학, 대통령궁, 전망대, 옛날 유태인 거주지 등이 있다. 레스토랑, 펍, 나이트클럽, 카페 등이 많다. 세 개의 십자가 언덕은 구시가를 굽어보는 오래된 상징물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3명의 수도자를 추모하여 17세기에 이곳에 십자가가 세워졌다.신시가는 구시가에서 2km 떨어져있으며 19세기에 대부분 건설되었다. 옛날 게쉬타포와 KGB건물이었던 시청이 여기에 있으며 리투아니아국민의 학살박물관(the Museum of the Genocide of the Lithuanian People)이기도하다. 이곳의 안내원들은 모두 과거 죄수로 그들이 고문을 받았던 방들을 보여 줄 것이다. 강 남쪽에는 미국 록의 전설 프랭크 잡파을 기리는 청동 흉상이 있다. 소비에트시절의 빌니우스 교외는 강 북쪽에 있다. 구시가 안팎에는 수많은 숙박시설이 있고 좋은 레스토랑을 찾기에 최고의 장소이다.



■ 큐로니안 모래톱 (Curonian Lagoon)


오존과 소나무가 섞인 전형적 발틱해안의 향기는 리투아니아 발틱해안을 대부분 차지하는 큐로니안 모래톱의 북쪽 리투아니아 절반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이 지역에는 유오드크란테(Juodkrante), 페르발카(Pervalka), 프레일라(Preila) 니다(Nida) 등 4개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해변으로부터 2 km이내에 있다. 엘크, 사슴, 야생 멧돼지 등이 사는 모래언덕과 소나무숲으로 우거진 98km의 분리된 가느다란 모래톱에는 신비한 기운이 감돈다. 큐로니안의 전통방식으로 신선하게 훈제된 맛있는 어류는 여기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다. 여름에는 니다에서 제트스키와 노젖는 보트를 빌릴 수 있다. 얼음낚시와 보드카를 마시는 것이 겨울에 주로 하는 것들이다.수영에 적합하지 않은 곳도 있기 때문에 다이빙하기 전에 산호초와 모래톱부근의 수질을 검사해봐야 한다. 반도를 따라있는 모래언덕은 신비하며, 이들의 조금씩 계속되는 침식은 환경보호론자들에게 큰 걱정거리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정된 장소에서만 걸을 수 있고, 모래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꽃들을 꺾어서는 않된다.북쪽 끝에 있는 스밀튀네(Smiltyne)에서 모래톱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페리가 본토의 클라이페다(Klaipeda) 마을에서 스밀튀네까지 운항한다. 빌니우스와 다른 주요도시에서 클라이페다까지 버스와 기차로 갈 수 있다.



■ 십자가언덕(Crosses' Hill in Lithuania)

낙타처럼 두 개의 혹이 있는 작은 언덕은 크고 작고, 비싼 것과 싼 것, 나무로 된 것과 쇠로 된 것 등 수 천 개의 십자가가 이루는 숲으로 덮여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신앙심에서 무엇인가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바쳐졌다. 이곳에 십자가를 세우는 전통은 14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비에트 시절에 적어도 세 번은 불도저로 밀렸만 다시 세워졌다. 바람이 불 때나 고요할 때 십자가와 묵주에서 나는 소리가 섬뜩한 기분을 자아낸다. 십자가언덕은 시아울리아이 북쪽 10km,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의 동쪽 2km에 있다. 시아울리아이는 카우나스 북쪽 140km 지점에 있으며 카우나스와 빌니우스 모두에서 편리한 기차와 버스 연결편이 있다.



■ 팔랑가(Palanga)

이 자그마한 도시는 겨울에는 조용하지만, 여름에는 리투아니아 최고의 해변 휴양지로 변신하며 숙박시설 역시 프리미엄이 붙는다. 긴 모래해변과 그 뒤의 소나무로 덮인 모래언덕, 장미정원이 있는 커다란 식물원, 이교도사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언덕, 훌륭한 호박박물관 등을 볼 수 있다. 팔랑가에서는 6월 첫 주에 화려하게 여름의 시작을 알리며 8월 마지막 토요일에 대단위의 거리 사육제, 시장, 노래축제, 팝 콘서트, 등이 함께 막을 내린다. 팔랑가는 클라이페다 북쪽 30km 지점에 있고 가장 가까운 기차역인 라트비아 국경도시 크레팅가(Kretinga)에서 18km떨어져 있으며 클라이페다와 빌니우스에서 매일 기차편이 있다. 버스편은 아주 많다. 팔랑가에 진입시 자동차운전자는 소액의 통과료를 지불해야 한다.



■ 트라카이(Trakai)

옛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트라카이는 지금은 섬과 호수가 있는 매력적인 시골풍의 작고 조용한 도시이다. 도시의 대부분은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바그다드에서 생겨난 유태인의 한 분파-카라이테스(Karaites)에 의해 세워진 오래된 나무 오두막집이 흩어져 있는 반도에 위치한다. 카라이테스들은 1400년경 뷔타우타스대왕(Vytautas the Great)의 수행원으로 봉사하기위해 트라카이로 왔으며 이 가운데 150여명은 여전히 이곳에서 살고있다. 이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고 있어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적은 소수민족이 곧 소멸할 것이라는 우려를 심화시키고 있다. 1997년 개조된 작은 카라이테스 박물관, 19세기 초기의 카라이테스 기도원이 있다. 트라카이는 빌니우스 서쪽 28km지점에 있으며 기차와 버스로 연결된다.



                                                                                      라트비아(Latvia)


․ 국 명 : 라트비아공화국
․ 면 적 : 64,589평방km

․ 인 구 : 262만

․ 수 도 : 리가(인구874,100)

․ 인 종 : 라트비아인 57%, 러시아인 30%, 벨라루스인 4%, 우크라이나인 3%, 폴란드인 3%

․ 언 어 : 라트비아어, 러시아어, 소수민족언어들

․ 종 교 : 루터교, 로만카톨릭, 러시아정교

․ 정 체 : 공화국


라트비아를 ‘발트의 스위스’라고 비유하려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국토의 10분의 1이 해수면 보다 낮으며, 50m까지 낮은 경우도 있다. 산악지대가 거의 없는 작고 평평한 땅으로 이루어진 라트비아는 발트 이웃국가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끼어 있는 습지가 많은 축축한 나라이다. 하지만 라트비아에서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 수도 리가(Riga)는 매력적인 해안도시로 많은 여행자를 끌어들인다. 리가에서 유르말라(Jurmala), 시굴다(Sigulda)성, 전망이 훌륭한 가우야(Gauja)계곡, 룬달레(Rundale)에 있는 라스트렐리(Rastrelli), 등지의 해안 휴양지로 일일여행을 가기 편리하다. 신생독립국가인 라트비아는 국가건설과 회생에 매우 열성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라트비아인의 30%는 러시아인이며 수도 리가는 라트비아민족이 러시아인 보다 수적으로 열세하다. 이러한 혼란스런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빠른 개혁을 막지는 못했고, 결과적으로 긴장된 상황을 가져왔다.

[지리 및 기후]

라트비아의 지리적 위치와 면적은 발틱국가들에서 중간에 해당한다. 북쪽의 에스토니아 보다 크고 남쪽의 리투아니아 보다는 작은데, 하여튼 발트 3국은 동쪽의 이웃나라인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비해 아주 작다.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발트해와 접해 있고, 발트해 안쪽으로 엄지손가락 모양의 리가만이 라트비아 북부 해안쪽으로 들어와 있다. 동부 라트비아의 비제메(Vidzeme)고지에는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지점인 가이지나 칼른스(Gaizina kalns)가 있으며, 그 높이는311m이다. 라트비아의 약 40%를 차지하는 산림지대에는 엘크, 사슴, 야생멧돼지, 여우, 스라소니, 불곰 등이많이 살고있다. 내륙 운하에는 비버와 수달피, 해안가에는 물개가 산다. 또한 라트비아는 흰 황새 6500쌍의 서식처이다(서유럽 전체의 흰 황새 숫자 보다 6배 많다). 리가의 서쪽 가우야강 계곡에 라트비아 유일의 국립공원이 있다. 수많은 자연보호지가 있고 그 중 3곳이 서부 라트비아의 쿠르제메(Kurzeme)에 있다.11월 초부터 해동기인4월까지는 기온이 섭씨4도 이상 거의 오르지않으며, 하루에 겨우 몇 시간 밖에 해가 나지 않는다. 6월에서 8월의 낮 시간에는 보통 14도에서 22도 정도까지 기온이 오른다. 7월과 8월은 가장 더운 시기이지만 소나기가 지속적으로 온다

[역 사]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적어도 BC 9000년이지만, 현재 라트비아주민의 첫 시조는 아마도 BC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들어온 피노-우그리족 수렵인으로 추정된다. 현대 라트비아인의 조상들인 발트족은 BC 2000경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의 부족들은 게르만족 및 로마제국과 상거래를 했다. 그 후 그들은 바이킹과 러시아인들과 때로는 무역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12세기까지 피노-우그리족과 발트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졌고 모두 자연숭배의 종교의식을 행했다. 로마교황의 북구 이교도에 대항한 십자군 소집령에 따라 게르만 선교단이 이 지역에 들어오지만, 13세기까지 성과는 별로 없었다. 리보니안 결사단(Livonian Order)이라 알려진 붉은 검과 십자가 문장이 그려진 흰 망토를 입은 십자군단이 1290년까지 이 지역을 강제로 개종시킨다. 라트비아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발트지역에서 개신교 스웨덴과 카톨릭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간의 다툼은1592년 진정된다. 리가를 포함한 라트비아 동부 대부분은 스웨덴의 지배에 들어간다. 스웨덴의 통치기는 압제에 시달리던 라트비아의 긴 역사에서 문명화 기회를 갖게 한 호의적인 일로 회고되고 있다. 17세기 스웨덴 왕은 농노신분의 라트비아 농부들에게 보통교육을 시켰다. 라트비아인에게 교역, 전문직업, 상업, 지적인 영역 등에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농노해방은 라트비아의 민족적 회생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 러시아화정책의 비우호적이고 억압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는 서서히 스스로 주권을 갖는 자주국가로 부상했다. 라트비아는 세계 2차대전시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바로 7일전인 1918년 11월 18일, 농부, 중산층, 사회주의자 그룹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농민당의 지도자 카를리스 울마니스(Karlis Ulmanis)가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및 발틱 독일정당 사이의 분쟁은 러시아가 라트비아 공화국과 영속적인 독립을 보장한다는 평화조약을 맺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 라트비아는 권위주의로 빠지고 1939년 8월23일(나치독일과 소련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였을 때) 소련의 영향권 밑에 들어간다. 1940년 8월까지 소련의 군사점령 하에 있었고,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며 라트비아는 소비에트연방에 속하는 하나의 공화국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제국가화와 숙청이 시작되고 일 년 안에 3만5천의 라트비아인이 사형, 추방, 혹은 망명한다.독일이 소련을 침입하였고 1941년 라트비아를 점령한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나치를 해방자로 생각하였고 독일군대에 지원하지만 라트비아의 유태인 9만 명은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많은 라트비아인이 1944년과 1945년 붉은 군대의 재점령을 피해 서방으로 망명하기도 하였지만, 2세계대전 당시 총45만에 가까운 라트비아인이 손실되었다. 그리고 1945년-1949년 스탈린 치하에서 17만5천이 사형 혹은 강제추방 당했다.소련의 가혹한 라트비아지배가 다소 느슨해지는 최초의 조짐은 1980년 후반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를 고무하기 시작했을 때이다.수 십 년간의 쓰라린 울분이 자치를 요구하는 대중집회로 나타났다.1988년 라트비아 정부요원들이 대중집회와 정치모임에 참가하였고, 한편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전면적인 압력은 대규모의 호응을 얻었다.1990년 봄 민족주의자들은 라트비아국회에서 다수당이 되며,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헌법을 회복시키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과도기를 선포한다. 1991년 초 국민투표의 결과에서 다수가 소비에트연방에서 탈퇴하기를 원하였고,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항한 쿠테타가 일어난 이틀 뒤인 8월 21일 라트비아는 완전한 독립국가임을 선포한다. 이는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1991년9월 6일 마침내 소련도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고, 2주가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는 UN에 가입한다.

[경 제]

국내총생산 : US$ 100억4천         일인당 국내총생산 : US$ 4260              연성장률 : 6%            인플레이션 : 7.4%

주요산업 : 식품, 목재가공, 섬유, 농업                   주요무역상대국 : 러시아, 독일, 스웨덴, 리투아니아, 핀란드, 영국

[문 화]

국제적으로 알려진 라트비아 예술가나 작품은 거의 없다. 이 나라의 문학은 19세기 안드레이스 품푸스(Andrejs Pumpurs)가 민속전래이야기에 바탕을 둔 민족서사시인 곰살해자라는 뜻의 라츠플레시스(Lacplesis)로 시작되었다. 만약 훨씬 덜 모호한 언어로 글을 썼다면 라트비아문학의 거장인 야니스 라인스(Janis Rainis)는 세익스피어나 괴테 만큼 인정받았을 것이라고 라트비아인들은 주장한다.다이나스(dainas)라고 알려진 라트비아의 운문은 종종 짧고 시적이며 일본의 하이쿠(haiku)와 비교된다. 19세기에 민족서정시와 노래의 방대한 집성이 크리스야니스 바론스(Krisjanis Barons)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제로 140만 민족서정시와 3만곡의 노래가 라트비아어로 쓰여졌다.최초의 주요 라트비아의 화가는 야니스 로젠탈스(Janis Rozentals)로 20세기 초에 농촌풍경과 초상화들을 그렸다. 빌헬름스 푸르비티스(Vilhelms Purvitis)와 야니스 발터스(Janis Valters)는 당시의 탁월한 풍경화가였다. 라트비아 집시사회의 지도자인 카를리스 루데비치(Karlis Rudevics)는 그가 번역한 집시의 시와 전설의 영감을 받은 뛰어난 회화작품으로 유명하다.라트비아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발틱어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두 언어 중 하나이며, 라트비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로 생각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국민 중 단지반 정도만 제일언어로 라트비아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부와 동부는 방언이 심해 중부의 표준 라트비아어와는 많이 다르다.라트비아인은 레트(Letts or Latgals), 셀로니아(Selonians), 세미갈리아(Semigallians), 쿠우르(Cours) 등의 부족을 조상으로 한다. 7대 도시에서 라트비아족이 러시아인 보다 수적으로 열세하다.20만 라트비아인이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독일, 영국, 미국 등의 서방국가에 살고 있다.. 라트비아에서는 훈제음식(특히 생선)과 낙농제품, 계란, 감자, 곡물이 대중적이다. 훈제된 넙치, 장어, 청어, 정어리 등이 주식을 이루는 음식들이고 특별히 저장처리된 칠성장어는 라트비아의 진미음식이다. 스프와 소시지 역시 대중적이다. 여름과 가을에는 신선한 열매로 만든 파이와 케이크가 풍성하다. 라트비아의 주요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이지만, 가장 마셔보고 싶은 술은 진하고 독한(45도) 리가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으로 불쾌할 정도로 강한 맛을 지닌 흑색 혼합음료이다. 이것은1755년부터 라트비아에서 유일하게 제조되고있다.

                                                                                                     리가(Riga)

리가는 다른 발틱국가의 수도인 탈린이나 빌니우스처럼 예쁘지도 건축학적으로 흥미롭지도 않지만, 대단히 활기찬 대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도시에는 러시아인의 수가 라트비아인을 능가하기 때문에 인종간의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다.리가는 다우가바(Daugava)강 양쪽에 위치하며 도시의 입구인 리가만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약15km 떨어져있다. 수세기전의 게르만양식 건물들이 역사구역인 옛날 리가 베츠리가(Vecriga) 전역을 덮고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성 피터교회의 나선모양 탑을 오르면 이 곳 여행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인 주변경치를 공중에서 볼 수 있다. 1330년 리보니안결사단(Livonian Order)의 본부로 리가성은 지어졌었지만 지금은 라트비아 대통령의 거처이다.리가의 구시가지 동쪽에는 19세기풍의 공원과 넓은 가로수길이 있다. 1935년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Freedom Monument)은 이 지역의 상징이다. 옛 리가를 둘러싸고 있는 신시가지는 19세기와 20세기 초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혼재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옛 리가의 남쪽에는 체펠린기구비행기의 격납고가 여러 곳 있었고, 활기 넘치는 중앙시장은 현대 도시생활의 중심이자 생활수준을 알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이 된다.2차대전때 리가의 유태인 강제이주지구는 마스카바스(Maskavas) 교외에 있었는데 지금은 리가의 유일한 유태교회와 유태인 박물관이 이 곳에 있다. 옛 리가의 동쪽8km 지점에 있는 자동차박물관을 놓치지 말고 보기를 권한다. 고르키, 스탈린, 후루쉬초프, 브레즈네프 등 과거 소련지도자들이 소유했던 자동차들과 존경 받지 못하는 그들의 실물크기 모형들이 볼만하다.여름이면 돔광장(Doma laukums)으로 테이블과 의자들이 쏟아져 나와서 광장은 값싼 카페, 맥주노점, 심야 바 등이 가득채워지는 유흥장소로 바뀐다. 리가에서 외식을 결정하기가 어렵지만 진정옛날 분위기로 돌아가고 싶다면, 옛 리가에 신선하지 않은 빵, 플라스틱 컵, 충충한 갈색벽, 굉장히 싼 가격의 보드카 등이 있는 소련스타일의 카페가 있다.



                                                                                                      유르말라 (Jurmala)

해변이란 이름의 유르말라는 리가의 서부해안을 따라 20km 이어져 있는 일련의 작은 마을과 휴양지들을 포함한다. 해변, 모래언덕, 숲, 박물관, 미술관, 레스토랑, 펍, 여인숙 등이 있어, 잠시 쉬며 노독을 풀기에는 최고이다. 게다가 전혀 혼잡하지않고 가기도 쉽다. 리가에서 한 시간에 여러 번의 기차편이 있고, 리가 기차역의 정면에 유르말라를 오가는 특별 택시가 있다. 만일 차를 몰고 유르말라에 가면 통행세를 지불해야 한다.




                                                                                                         시굴다 (Sigulda)

이 지방에서 ‘라트비아의 스위스’라고 알려진 시굴다와 그 주변은 줄지어선 위풍당당한 중세의 성들과 가우야계곡의 가장 아름다운 지류를 따라 흩어져있는 전설을 지닌 동굴들이 멋있는 경치를 뽐낸다. 시굴다는 가우야국립공원의 주진입로이며 미성년자를 위한 건강휴양지이자 동계스포츠의 중심지이다. 옛 시굴다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옛날 십자군 기사단이 거주했던 곳에 19세기에 새로 지어진 시굴다성은 지금은 요양소로 쓰인다. 구트마니스 (Gutmanis)동굴과 빅토르의 동굴은 지역 민속학연구에 중요하다. 시굴다는 리가 동쪽53km에 있으며 버스와 기차편이 자주 있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물

1885년에서 1905년 사이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사조의 명칭으로 회화, 건축, 실내장식, 그래픽 등에서 종래의 천편일률적이고 모방적인 양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조의 건물이다. 아르누보, 라트비아어로는 유겐트스틸(Jugendstil)이라고 한다.리가에서는 아르누보가 특히 건축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래의 성당중심주의, 이태리적 건축양식을 배제하고 라트비아의 사상을 화려한 장식에 융합시킨 리가의 건축물은 유럽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로 손꼽힌다.아르누보가 유행하던 시대에 리가는 비행기, 기차, 자전거, 자동차 등을 생산해 내는 공장이 많은 부유한 항구도시였으며 따라서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시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리가의 아르누보는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부유한 여건이 건축물에 화려함을 더해줬다.리가에 있는 건물 중 1/3이상이 아르누보 건축물일 정도로 아르누보의 본산지라 할 수 있다. 리가 아르누보의 대표적 건축가는 알베르타 거리의 빌딩을 지은 아이젠스타인이며 라우베, 펙젠스 등도 유명하다.많은 건축물에서 새로운 삶을 태양으로 형상화한 아르누보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외에도 각종 식물들, 몽상적인 사람의 얼굴, 신화에 나오는 신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아르누보 건축물 들을 볼 수 있다.대표적인 아르누보 건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거리는 알베르타 거리, 엘리자베테스 거리, 스트렐니쿠 거리 등이며 화려하게 보수공사를 한 건물도 있고 백 년 전 모습 그대로인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