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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발칸

동유럽 발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9-29 11:13
조회
1007
                                                                                         체코 Czecho


․수도 : 프라하(Praha, Prague, 120만명)
․인구 : 약 천 30만명

․면적 : 78,864㎢ (한반도의 약 1/3, 평지:산악=7:3)

․주요도시 : 브르노(Brno), 오스트라바(Ostrava)

․주요민족 : 체코인(Czech 94%), 슬로바키아인(Slovak 3%), 폴란드인, 독일인, 헝가리인 등

․주요언어 : 체코어(Czech)

․종교 :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 39%), 신교(Protestant 2%).

․통화 : 체코 코루나 (CZK 1) = 60원 (2021.12.)


체코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프라하를 중심으로 한 보헤미아와 브르노를 중심으로 한 모라비아이다.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부 내륙 지방에 위치한 체코는 1세기부터 켈트인이 거주했으나 로마에 정복된 뒤 5세기에는 슬라브족이 7세기에는 사모국이 8세기 말에는 모라비아 왕국이 들어섰다. 9세기경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족이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 뒤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 점령되었다. 10세기에는 보헤미아 왕국으로 번영하여 보헤미아 왕이 폴란드와 헝가리 왕을 겸임하는 등 국력이 강해졌고 14세기에는 카를 4세가 신성로마 제국 황제에 오를 정도로 부강해졌다. 그러나 종교개혁 운동과 함께 일어난 후스파와 교황파의 전쟁으로 16세기에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독일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

1945년 소련에 의해 해방되어 사회주의가 진행되었으나 그후 자유화 민주화의 소리가 높아지고 정치 및 경제의 개혁 바람이 불면서 프라하의 봄은 그 결실을 맺는다. 1993년 1월1일 각각 체코와 슬로바키아 독립국가로 분리 되었다.

[지 리]

총 면적 78,864㎢의 체코는 중부 유럽에 속해 있고 주위로 독일,오스트리아,폴란드,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1,000-1,600m의 산맥에 둘러싸인 보헤미아 분지와 모라비아로 나뉜다.

[기 후]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사정이 다른 2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부의 보헤미아(수도 프라하가 있다.) 동부의 모라비아(중심지는 브르노)가 그것이다. 대체로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나라의 대부분에 500mm 이상의 강우량이 있으며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온다.

                                                                                                             프라하 Praha

체코의 수도이며,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 신비스러운 고도이며, 작은 골목하나에도 중세의 향기가 베어있다. 또 시내 곳곳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양식, 르네상스양식,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있다. 체코에는 또한 카프카와 쿤데라를 비로한 위대한 작가들도 많이 있다. 문화유산을 볼 때에도 드보르작과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곡가를 낳은 나라 체코에는 지금도 음악이 번창하여 체코인이라면 누구나 음악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프라하 연평균 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1

-1

3

7

12

15

17

17

13

8

2

0



바츨라프 광장 (Vaclavske namesti)
중세시대 말 곡물 시장이 섰던 곳으로 사방이 탁 트인 광장이라기보다 드넓은 대로다. 지금은 차도와 인도로 나뉘어 있고, 중앙에 녹지가 조성돼 원래 광장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대로변에 늘어선 상점, 카페, 은행 등은 대부분 20세기 들어 지은 것이다. 바츨라프 광장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프라하 시민의 집회 장소로 쓰였다. 이곳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던 학생들이 분신을 했고, 벨벳 혁명 때 시민이 모여 민주화를 쟁취했다. 광장 이름은 체코의 최초 왕조인 프르셰미슬 왕가의 왕 바츨라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 받은 체코 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바츨라프 동상이 광장 동남단에 성인 4명의 수호를 받으며 서 있다.
프라하 성 (Prazsky Hrad)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양식이 가미되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변화하다가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1918년부터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내부 장식과 정원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왕궁뿐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이며, 특히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끈임 없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운 프라하의 휴식처, 카를교(Karluv most)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유명 관광지로 12세기에 이미 목제교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강이 번람할 때 붕괴되어 12세기 중엽에 석재교로 대체되었다.이 석재교 또한 강물로인해 붕괴되어 1357년 카를4세 때 교회 건축가인 피터 팔레지(Petr Parler)가 다시 건축하여 1402년 완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16m의 길이에 16개의 기둥과 3개의 브릿지 타워가 있다. 구시가지 브릿지 타워는 많은 조각상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릿지 타워로 꼽히고 있다. 바로크 시대(18C)에 만들어진 30개의 조각상이 다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조각상은 Matyas Braun과 E. M. Brokoff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황금소로 (Zlata ulicka)
왕궁의 북쪽 성 이르지 교회에서 언덕을 내려가면 그곳은 16세기 그대로인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것 같은 작은 길로 나오게 된다. 길을 사이에 두고 성벽의 가장자리에 탑 달리보르카가 세워져 있다. 이탑은 중세의 감옥이었다고 한다. 이 길의 22번지에 위치한 작은 집은 작가 카프카와 인연이 있는 집.
성비트 성당(St Vitus Cathedral)
총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탑높이 100m의 프라하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건축물중 하나로 현재 대통령궁으로 쓰이고 있는 프라하성곽안에 위치해 있다. 교회의 건축이 시작된 것은 600여년전인 1344년이나 증개축이 계속되어 체코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29년이다. 또 성당이 완성되었을 때는 초기 비투스 성당의 최초 설립자이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웬체슬라스 왕자 사망 1,0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성당의 서쪽입구 청동문에 이 교회의 역사에 대해 묘사되어 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되어서인지 건물은 중세의 고딕양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점차적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천부적 재능의 체코 예술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18세기의 바로크식 건축물, 성 미쿨라셰 교회 (Sv. Mikulase Chram; 영어로는 성 니콜라스 성당)
이 교회는 구시가광장에 위치한 1732-1735년에 건축된 바로크식 건물이다. 얀 후스 동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구시가지 광장에는 이 성 미쿨라셰 교회와 틴 교회, 각종 레스토랑과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곳은 1920년에 탄생한 후스파 교회로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음악회도 열린다.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틴 교회(Tynsky Chram)
1365년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교회로 성 비토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작은 탑이 주변을 에워싸고 그 중앙에 우뚝 선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데, 프라하 시내 어디에서든 보인다. 꼭대기가 금빛으로 빛나는 첨탑은 높이가 80m로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프라하에서 단연 눈에 띈다. 원래 두개의 첨탑 사이에는 후스 파를 상징하는 황금성배가 있었는데 1621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황금 성배를 녹여 마리아 후광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체스키크럼로프 (Cesky Krumlov)

체코 공화국의 남동쪽에 자리한 중세의 성도시인 체스키 크룸로프는 인구 약 1만 5천의 작은 도시다. 체스키 부데요비체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져 있으며, 블타바 강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강은 남쪽으로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바바리아를 서로 분리시키는 슈마바(Sumava) 산 아래에서 S자형으로 흐르고 있다. 13세기의 한 지주가 이곳에 성을 건설하면서 이 도시의 역사도 시작되었는데, 이미 700년의 역사가 흘렀으며 중세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겨져 있다. 붉은 기와지붕의 중세적인 건물들과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고딕양식의 성, 바로크와 르네상스 등 중세의 미술양식이 섞인 정원들 등이 그것이다. 성아래로 구시가지가 발달해 있는데, 지금까지도 이 도시의 중심으로 각종 상점과 박물관 등이 늘어서 있으며 지금까지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1992년에 프라하, 성 요한 네포묵 순례교회, 쿠트나 호라, 호란 비체 등과 함께 보헤미아 땅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Zamek)

이 성은 체스키 크룸로프와 그 역사의 시작을 같이 한다. 13세기 중엽, 대지주였던 비텍(Vitek)가가 블타바 강이 내려다 보이는 돌산 위에 고딕 양식의 성을 건설함으로써 이 도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700년이 흐른 고도로서의 체스키 크룸로프를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며, 이 도시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둥근 탑과 길다랗게 늘어져 있는 옛 건물들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옛 왕궁으로 쓰였던 이 건물은 두터운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중세 귀족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방과 식당, 창고, 부엌, 접견실 등에 각종 공예품과 그림,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보헤미아 성으로서는 프라하 성 다음으로 규모가 큰 것이며, 성은 4개의 정원을 통해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번째 정원이 있는 부분과 두번째 정원이 있는 부분, 세번째와 네번째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성을 드나드는 나무문을 붉은 문(Cervena brana)이라고 하며, 그 문을 통과하여 안쪽 정원의 정면에 서 있는 건물(Hradek)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까를로비 바리 Karlovy Vary


독일 국경에 인접한 서보헤미아 지방은 예부터 온천으로 유명하다. 특히 카를로비바리, 마리안스케라즈네, 프란티슈코비라즈네 등 3개 도시는 ‘보헤미아 온천 삼각지대’로 불리며 많은 유럽인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중 카를로비바리는 ‘카를의 원천’이라는 뜻의 온천 마을로, 14세기 중반 카를 4세가 보헤미아 숲에서 사냥하던 중 몸을 다친 사슴이 원천에 들어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카를로비바리의 온천이 널리 알려졌다. 18세기에는 왕족과 정치가 등 저명인사와 수많은 예술가들이 휴양차 카를로비바리를 찾았다. 온천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가 아름다워 볼거리가 많다. 체코 온천은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것뿐만 아니라 시음을 하는 치료법으로 유명하다. 콜라나다(온천이 솟는 주랑)에는 곳곳에 온천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다. 온천 수질은 탄산, 염수, 알칼리 성분이 풍부해 간장 장애, 소화기 계통 질환에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컵만 있다면 얼마든지 온천물을 마실 수 있다. 컵은 마을 곳곳에서 판다. 이곳 카를로비 바리는 괴테, 베토벤, 브람스 등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세계 유명인사들이 찾아와 요양했던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중의 하나랍니다. 또한 주변 경치도 아름답고, 영화제로도 유명한 곳이다. 카를로 비바리에는 많은 온천이 있지만 두곳에 온천이 대표적 이다.

(1) Lazne5 (라즈녜 5 : 라즈녜는 온천이라는 뜻)

위치는 까를로비 바리에서 큰 호텔(검정색 호텔)인 떼르말 호텔 맞은 편에 위치한다. 보통은 의사의 처방전을 받고 온천을 하지만, 이 곳에서 직접 처방을 받고 할 수 있는 코스와 처방전 없이 온천을 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개인별 욕조에서 온천을 할 수 있으며, 욕조마다 물방울의 형태로 다양한 코스가 있으니 선택을 하면 된다. 온천 시간은 40~50분정도가 가장 좋다. 그 이상 하면 아마도 많은 피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발마사지와 전신 마사지 코스가 있는데 온천욕과 마사지를 한 코스로 함께 선택을 하여야 한다. 마사지는 발마사지와 전신 마사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1시간 반 정도 온천과 마사지를 하면 여행중의 피로를 충분히 풀 수가 있다.

2. Zamecke Lazne

이 곳은 원천 쪽에 있으며, 온천물로 야외 수영을 즐길 수가 있는 곳이며 시설과 분위기가 아주 좋다. (위 Lazne 5 에서도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는 있지만, 온천물이 아니다.) 그리고 사우나 코스가 있고, 남여 혼욕이므로 수영복이 필요하다. 사우나의 요금은 10~20유로 정도이다.




                                                                                                           오스트라바 OSTRAVA

체코 제4위의 대도시로 프라하 동쪽 280km, 오데르강(江)의 넓은 골짜기에 위치하며, 폴란드와의 국경에서 불과 15km 지점에 있다. 시와 그 주변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코크스탄으로 적합하며, 1763년 발견되었으나 대규모의 채굴이 시작된 것은 1850년 이후이다. 19세기 말~20세기에 걸쳐 점차 근처의 마을을 병합, 발전하여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60년에는 약 2500만t을 산출하여 체코 전생산량의 4/5를 차지하였다. 오스트라바 카르비나 탄전의 매장량은 약 100억 t이라고 하며 탄층은 폴란드의 상(上)슐레지엔까지 연속되어 있다. 20여 개의 탄광을 바탕으로 야금·코크스화학·보일러·크레인·광산용 대형기계·화학비료 등의 공장이 늘어서 있는 외에, 1829년 설립된 제철소 등 중요기간산업이 집중되어 있어 체코의 심장이라고 일컫는다. 또 야금·기계공업의 전문학교·연구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남쪽과 서쪽의 교외 구릉지에는 새로운 주택지와 베드타운이 건설되어 있다.


노쇼비체 (NOSOVICE) 현대 자동차 공장
현대 자동차 공장은 오스트라바(Ostrava) 근처의 노쇼비체(Nosovice)라는 곳에 있는데, 프라하에서는 약 400여 km 떨어져 있다. 2차 대전 중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반인륜적 범죄가 자행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가 이곳에서 겨우 100여 km 정도 떨어져 있다. 원래는 농지였다는 200 ha의 땅에 자리 잡은 공장은 Stamping, Welding, Paint, Assembly, Transmission Shop이 각각 별도의 빌딩으로 서로 인접해 위치해 있고 MOBIS, DYMOS, HYSCO 같은 부품회사들이 조립라인과 연결되어 있거나 공단 내에 인접해 있다.


                                                                                                  플 젠 Pilsen

체코 서부 보헤미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이며 플젠 주의 주도이다.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90km 정도 거리에 있으며 브르노, 오스트라바 다음으로 큰 공업 기술 중심 도시이다. 도시 인근에서 생산되는 철광석과 석탄으로 기계 공업이 발달하여 스코다(Škoda)의 자동차 공장이 있으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맥주의 하나인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의 맥주 공장도 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
가로 139m, 세로 193m의 리퍼블릭 스퀘어 (공화국 광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은 1390년 완공된 높이 102.6m의 체코에서 가장 높은 성당 탑이다. 유럽 고딕 양식의 성모 마리아와 어린 예수의 조각으로 유명하며 301개의 계단을 오므련 아름다운 플젠의 풍경을 볼 수 있다.
필스너 우르켈 Pilsner Urquell
수백가지가 넘는 체코 로컬 맥주 브랜드중 전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맥주 브랜드는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이다. 이 맥주는 프라하에 서 약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플젠(Plzeň)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황금 빛 라거맥주이다. 필스너 우르켈 브루어리는 전 세계에서 맥주 애호가들 이 줄지어 찾아오는 '맥주의 성지'와 같은 곳 이다.
                                                                                       

                                                                                          슬로바키아 (Slovakia)


․ 수 도 : 브라티스라바 (Bratislava, 45만명)
․ 인 구 : 약 540만명 (1998)

․ 면 적 : 49,035 ㎢ (한반도의 약 1/5)

․ 주요도시 : 코시체(Kosice), 트르나바(Trnava)

․ 주요민족 : 슬로바키아인 (Slovak 86%), 헝가리인(Hungarian 11%), 체코인(Czech 1%)

․ 주요언어 : 슬로바키아어 (Slovak)

․ 종 교 : 로마 카톨릭 (Roman Catholic 60%), 신교 (Protestant 6%)

․ 화 폐 : 유로 (EURO 1) = 1,370 (2021.12.)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리된 슬로바키아는 1989년 공산당이 그 세력을 포기하게된 벨벳 혁명 (Velvet Revolution) 이후 불안정인 소강 상텔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나나도 동구권 국가들의 자랍 노력에 동참하고 그 동안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친 체코 스타일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다. 수도인 Bratislava는 작지만 뛰어난 문화생활을 갖춘 활기찬 도시이고 반면 시골마을에는 전통적인 농가의 모습이 뚜렷이 남아 있다.

[지 리]

슬로바키아는 산악지대국가이다, 카르파티안 (Carpathian) 산맥은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 근처에서 시작하여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Transylvania)에 이른다.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 중부지방의 반스카비스트리카 (Banska Bystrica) 근교로 모아지는 저지 타트리(the Lower Tatras)와 북부지방의 프로프라트 (Proprad) 근교의 고지 타트리 (the Lower Tatras)로 볼수 있다. 몇몇의 높은 정상들로 인해 폴란드와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기도 한다,

[기 후]

슬로바키아는 사계절이 뚜렷한 대륙성기후의 나라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겨울은 춥고 건조하며 여름에는 무덥고 습하다. 수도 브라티스라바 Bratislava의 1월평균기온은 섭씨 3℃ ~ 2℃이고 6월에는 16℃~26℃이다. 산악지대로 갈수록 차가운 기온분포를 보인다. Bratislava의 연평균 강수량은 650㎜ 정도이고 고산지대에서는 연간 130여일동안 눈이 내린다.

[사회문화]

슬로바키아인들이 국내거주자의 86%에 이르고 헝가리인들이 11%를 차지해서 가장 큰 소수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 로마인(집시), 체코인, 우크라이나인, 독일인들로 거주하고 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기원전 400~500년에 다뉴브강근처에 정책했던 슬라브인들의 후손이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농민계층이었고 농민해방 이후에는 농지경작에 강한 애착을 보이며 살아왔당, 공산주의하에서 어느정도의 산업화가 이루어져 지금은 슬로바키아 인속적인 삶과 근대적인 생활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1989년 정치적 변혁 이후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사회에 퍼졌지만 아직도 많은 문화운동이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인구의 대다수가 여적히 농업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블라티슬라바 (Bratislava)

2004년 유럽연합의 신생국가로 새롭게 등장한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 슬라바는 인구 50만의 작은 도시다. 오스트리아 국경과 헝가리 국경 16Km 접경되어 있으며 도시중심에는 우리가 다뉴브강이라고 알고있는 두나이강이 흐르는데 이 두나이 강은 발칸반도를 거쳐 흑해로 이어진다. 이 두나이강 북쪽에는 회사와 각종 행정기관, 다양한 문화시설등이 모여있으며, 남쪽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다. 구시가의 오페라 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박물관과 갤러리들이 모여있으며, 로마시대에 건축된 브라티슬라바성이 여러번 재건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슬로바키아의 수도이지만, 아직까지는 타트라보다는 관광객이 많지 않은 곳으로 지역간 불균형 문제, 실업문제, 환경, 교육문제 등이 산적해 있는 질곡의 역사 가운데서도 브라티슬라바는 다양한 축제와 EU가입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블라티슬라바 평균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1.3

0.4

4.6

10.4

15.0

18.4

20.3

19.6

15.8

10.4

4.8

0.9

평균강수(㎜)

36.2

41.4

37.9

36.0

56.8

71.3

62.2

62.2

36.9

39.8

53.1

49.6





                                                                                                               타트라 (TATRA)

타트라(2663m) 산맥은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지대에 걸쳐있는 알프스 산맥 중 하나이다. 총 면적의 3/4이 슬로바키아에, 나머지 1/4이 폴란드령에 속한다. 양측 타트라는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지형과 지질, 암석의 종류에 의거, 타트라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부 타트라(TATRY ZACHODNIE), 하이 타트라(TATRY WYSOKIE), 비엘스키에 타트라(TATRY BIELSKIE)가 그것들인데 하이 타트라와 비엘스키에 타트라는 동부 타트라로 묶이기도 한다. 가장 높으면서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은 하이 타트라로, 최고봉은 해발 2655m에 달하는GERLACH이다. 1949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타트라스 국립공원(TANAP)은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총면적 741㎦로, 서부와 하이 타트라의 슬로바키아 지역과 비엘스키에 타트라 전 지역을 포함한다. TANAP의 경계로는 북쪽으로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선, 동쪽으로 ZDIAR-TATRANSKA KOTLINA ROAD, 남쪽으로 산림구분선 그리고 서쪽으로 SUCHA DOLINA 계곡이다. 공원측의 삼엄한 보호로 인해 현재 이곳에는 수많은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때묻지 않은 자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타트라 국립공원 (The High Tatras National Park)


타트라(2663m)는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지대에 걸쳐있는 알프스 산맥 중 하나이다. 총 면적의 3/4이 슬로바키아에, 나머지 1/4이 폴란드령에 속한다. 양측 타트라는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크로아티아 CROTIA


․국명 : Republic of Croatia
․수도 : Zagreb(자그레브)

․언어 : 크로아티아 어

․종교 : 가톨릭(76%) 정교(11%)

․민족 :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등

․주요 도시 : Zagreb(자그레브), Plitvice (플리트비체), Split (스플릿), Dubrovnik (드브로브닉)

․화폐단위 : Kuna 1 (쿠나) : 180원 (2021.12.)


[개 요]


정식 국가 명칭은 크로아티아공화국(Republic of Croatia)이며, 크로아티아어로는 레푸블리카 흐르바트스카(Republika Hrvatska)라고 한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크로아티아를 흐르바츠카(Hrvatska)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18년에 수립된 남부 슬라브족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고,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와 내전을 거쳐 1991년 6월 분리 독립하였다.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중서부의 알프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 유럽 아드리아 해 동부 해안에 위치하며 헝가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접경하고 있다. 면적은 5만 6594㎢로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이며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약 450만 명이다. 수도는 자그레브(Zagreb)로 약 8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주요 도시로 스플리트(Split), 오시예크(Osijek), 리예카(Rijeka), 두브로브니크(Dubrovnik)가 있다. 남부 해안 지역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이며 북부 내륙 지역은 대륙성 기후 특징을 보인다. 공식 언어는 크로아티아 어이고 슬라브계 언어로 라틴문자를 사용한다. 민족 구성은 크로아티아인 78%, 세르비아인 12%, 기타 10%로 이루어져 있고 종교는 가톨릭 87.8%, 세르비아 정교 4.4%, 이슬람교 1%, 기타 6.5%로 구성되어 있다. 표준 시각은 그리니치평균시(GMT, Greenwich Mean Time)보다 한 시간 빠르며 한국 시각보다 8시간 늦다. 의무교육 기간은 8년이다. 화폐단위는 쿠나(KUNA)로 2010년 8월 기준으로 1달러는 약 5.5쿠나 이다.

                                                                                                          자그레브 Zagreb

유구한 역사의 중유럽 도시이자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수도인 자그레브는 1094년에 주교구로서 유럽 지도상에 출현했다. 역사 깊은 두 개의 언덕인 그라덱Gradec 과 캅톨Kaptol 부근에 세워져서 메드베드니차 Medvednica 산등성에 위치해 있는 자그레브는 메드베드니차와 사바 Sava강 사이의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17세기~18세기에 걸쳐 대화재와 전염병으로 인해 도시로서 번성이 주춤하였으나, 1776년 왕실 의회와 왕실 총독부가 옮겨진 후부터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가담하여 자그레브(Zagreb) 관할 구역이 확대되면서 1920년대 인구가 70%가량 증가하고 점차 중심지로서 입지를 다졌다. 이후 자그레브는(Zagreb)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에 수도 베오그라드(Beograd)를 잇는 제2의 도시이자 연방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유고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전쟁(1991년~1995년) 당시 유고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큰 피해는 없었으며 독립 후 크로아티아의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 대도시로 성장한 자그레브는 마치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세 개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상부 도시(Upper town)는 지난 시절의 평화와 고요가 매혹적인 곳이고 하부 도시 (Lower town)는 유럽의 거대 상업도시에 비길 만큼 활기찬 지역이다. 그리고 신 자그레브(New Zagreb)라고 불리는 지역은 현대 건축과 도시화의 전시장을 연상케 하는 모던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 자그레브 평균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

-0.5

1.8

6.1

10.7

15.3

18.7

20.5

20

16.4

11

5.6

1.3

평균강수(㎜)

48.6

41.9

51.6

61.5

78.8

99.3

81

90.5

82.7

71.6

84.8

63.8




성 마르코 성당 [ Crkva Sv. Marka , St. Mark Church ]
13세기에 지어진 성 마르코 성당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인 그라데츠(Gradec) 구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빨강, 파랑, 흰색의 아름다운 체크무늬 바탕의 지붕으로 유명한 성 마르코 성당은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건물 중의 하나로서 지붕의 왼쪽에는 크로아티아 문장이, 오른쪽에는 자그레브 시 문장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Ivan Meštrović)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화려한 벽화와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자그레브 대성당 [ Katedrala Marijina Uznesenja , Zagreb Cathedral ]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 캅톨(Kaptol) 구역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11세기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공이 되기도 전인 1242년 몽골족의 방화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몽골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그라데츠(Gradec) 구역을 중심으로 외벽을 쌓고 대성당을 재건하였지만, 1880년 대지진으로 인해 대성당은 또다시 수난을 겪게 되었다. 자그레브 성당의 현재의 모습은 중세 원형을 복원하여 1899년에 완공되었으며, 19세기 후반 네오고딕 양식을 취하고 있는 108m의 쌍둥이 첨탑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바로크 양식이다. 


                                                                                                     플리트비체 Plitvice 국립공원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자그렙(Zagreb)과 자다르(Zadar),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약 19.5Ha에 해당하는 면적의 숲으로 이루어진 이 국립공원은 곳곳에 16개의 청록색 호수가 크고 작은 폭로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약 18km 길이의 인도교는 개울 위를 지나기도 하고, 개울이 인도교 위를 지나 얕게 흐르기도 하여 매우 상쾌한 산책로를 형성하고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보존을 위해 내부의 모든 인도교, 쓰레기통, 안내표지판 등을 나무로 만들었고, 수영, 취사, 채집, 낚시가 금지되어 있으며 애완동물의 출입도 막고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그 크기가 매우 커 구석구석을 자세히 보려면 3일 정도가 소요되는 공원이다. 하지만 근처의 대도시 자다르나 자그레브에서 하룻 동안 들러서 보아도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봄철에는 풍부한 수량의 폭포의 웅장함을 볼 수 있고,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진 울창한 숲 속의 신비로운 호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가을철에는 사람이 적어 고요한 분위기와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사시사철 매력 있는 곳이다.




                                                                                                       라스토케 Rastoke

라스토케는 천사의 머릿결이라는 뜻으로 작은 플리트비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으로 천사의 머릿결같은 폭포가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환경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플리트비체 호수가 가까이 있는 물의 도시이자, 물이 많아 집 사이 사이에서도 물이 흘러 그 물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를 돌리기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드브로브닉 Dubrovnik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 불리며 돌출된 바위 지형에 드브로브니크 시(주)가 생겨난 것은 7세기의 일이었다. 전쟁 등의 역사적 격정을 거치고 때론 여러 나라들과 타협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크로아티아에서 유일하게 내내 값진 독립을 유지했던 지역이다. 일찌기 바다를 이용한 해양산업에 진출하여 시의 문명화가 이루어졌다. 초기 단계부터 드브로브니크의 붉은 깃발은 모든 해양을 누비는 출항선박의 돛대 위에서 휘날렸고 이 배들은 풍성한 포획물을 싣고 귀항하였다. 대내외적인 도시의 특성은 이 시기의 번영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는 강한 방위 벽으로 둘러 쌓여있고 관공서와 광장, 좁은 중세거리의 주택들은 로마와 고딕시대 스타일을 띄고 있다. 많은 법률들이 시민들의 고매한 인간성을 대변해주는데 그 예로 유럽에서 처음 제정된 노예 매매 금지법(1416년)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과학을 비롯, 모든 분야의 학문과 예술이 이 작은 도시에서 번영하여, 아드리아해상에 빛났다. 이 곳의 학자들은 세계 여러 나라로 가서 이 지역의 높은 학문수준과 유럽 문화를 전파하였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시의 출중한 문화수준은 현대에도 이어져 매년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리는 여름 축제는 각종 쇼와 이벤트로 삶의 풍요를 더해주고 있다.


드브로브닉 대성당 (Cathedral Treasury)
1713년 지진 이후 파괴된 건물을 1981년과 1986년 복구한 대성당은 드브로브닉에서 가장 큰 교회이다. 교회 내부의 보물실에는 성 블라이세 관련 유품과 금으로 만든 보석과 은세공품, 티치아노의 <성모 마이라의 승천>, 라파엘로의 <마돈나>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81년 교회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은 건물의 지층에서 다른 건물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7세기 처음 지어졌을때는 비잔틴 양식, 12세기에는 로마네스코 양식, 18세기에는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졌다. 대성당에는 영국의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에 대한 전설도 전해온다. 12세기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항해 중 풍랑을 맞은 왕은 드브로브닉 바로 앞에 떠 있는 로크룸섬에서 표류하여 목숨을 건진다. 리처드왕은 신에게 감사하며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렉터 궁전 (Rector's Palace)
1441년 건축된 렉터 궁전은 1435년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훼손된 건물을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이의 설계로 1층은 르네상스 양식, 2층은후기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궁전은 원래 드브로브닉의 통치자인 수도원장의 집무공간으로 수도원장의 사무실과 개인 공간, 접견실, 안뜰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 성벽
드브로브닉 성벽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성벽으로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건설 되었으며 지금도 그때의 모습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14세기에 12개의 장방형 성채로 강화되었고 15세기에는 투르크 족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견고하게 보강되었다. 성벽의 총 길이는 1,940m이며 높이 25m, 너비는 바다 쪽이 1.5~3m이고, 내륙은 6m까지 되는 곳이 있다. 성벽의 2/3 는 바다와 만나는 절벽 위에 쌓았고 1/3은 도시 쪽에 쌓았다. 성벽으로 들어가는 문은 3곳, 성벽 올라가는 곳은 2곳, 5개의 요새와 15개의 망루가 있다.
플라차 거리
플라차 거리는 드브로브닉 도시가 형성된 7세기에는 물자를 수송하던 운하였으나, 도시가 커지면서 1468년 수로를 매립하여 도시 남북을 나누는 중심도로를 만들었다. 이 전 플라차 거리에는 호화로운 건물이 많았는데 1676년 발생한 대지진으로 구시가지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대지진 이후 건축되었다. 대지진 이후 건축된 건물은 드브로브닉 공화국 법령에 따라 건물의 외형과 높이가 동일하게 지어졌다. 1층은 반드시 상점이 들어서야 하는 법에 따라 건물의 1층은 까페, 레스토랑, 상점, 갤러리 등으로 사용되고 2층은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1235년 아씨시 출신의 성 프란체스코(1181~1226년)가 드브로브닉에 머물면서 젊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시 외곽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1317년에는 현재의 자리에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교회, 정원, 도서관, 박물관을 갖춘 복합 수도원 시설을 건축하였다. 수도원 건물과 부속 건물을 건축하는 데 1세기가 걸렸으며 수도원은 당대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수도원 들어가는 문 위쪽 벽면에 조각된 피에타(1498년 Pieta),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1498년 페트로비치 형제에 의해 조각된 피에타 상은 1667년 대지진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플릿 Split

20만 여의 인구가 거주하는 스플리트는 중앙 달마티아(Central Dalmatia : 크로아티아 남서부, 아드리아해(海) 가장자리를 끼고 있는 해안지방)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 카스텔라 만(Kastela Gulf)의 동부와 스플릿 해협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 째로 큰 도시이다. 스플릿은 또한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 역사는 BC295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곳 스플릿에 자신이 거주할 궁전을 건설하고고 명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세상을 떠난 BC313년까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살았고, 그 이후 계속해서 황제들이 사용하였다. 1420년부터 1797년까지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람들의 정복을 받았고,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잠깐 동안은 프랑스 사람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도시 곳곳의 유적들이 유네스코 지정의 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답고 뛰어난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디오클레시안 궁전
동서 181m, 남북 215 m 규모의 궁전은 남쪽 성벽 높이가 22m, 북쪽성벽 18m, 두께 2.1m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295년부터 305년까지 10년에 걸쳐 건축된 궁전은 스플릿 앞 바다 브라체 섬에서 석회석, 그리스와 이태리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궁전 사방으로 16개의 감시탑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 지금은 3개만 남아있다. 궁전은 동서남북으로 2개의 대로가 지나면서 4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황제의 거처는 궁전남쪽(해안가)을 차지한 두 개의 구역이고 반대편 장방형 지붕이 보이는 2개 구역은 700명의 하인과 병사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북문은 금문(Golden Gate), 동문은 은문 (Silver Gate), 서문은 철문 (Iron Gate), 남문은 동문(Broze Gate)로 불린다.


                                                                                                           트로기르 Trogir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달마티아 카운티의 아드리아 해안에 있는 도시이다. BC 3세기에 건설된 도시로 로마시대에는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13∼15세기에 도시를 둘러싼 성벽 안에 도시가 발전하였다. 2,300년 이상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그리스·로마·베네치아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아드리아 해 지역은 물론이고 중부 유럽에서도 보존 상태가 우수한 역사 지구이다. 교회·탑·궁전·요새·주거지 등이 밀집되어 있는 로마네스크 고딕 복합지역이다.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 도시로 지정되었다.



성 로브로 성당
성 로브로 성당은 성 로렌스(Cathedral of St. Lawrens)으로도 불리우며, 13~15 세기에 걸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성당 입구에 라도반의 정교한 조각품 <아담과 이브>가 장식되어 있다. 성 로브로 성당 내부에서 왼쪽 중간에 있는 소 성당은 성이반 예배당으로 1486년 ~ 1487년 ‘니콜라스 플로렌스 (Nicholas of Florence)가 만들었으며 달마치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축물이다. 이반 울시니 주교에게 바쳐진 소 성당으로 성당 정면에 이반 울시니 주교의석관이 놓여있다.


                                                                                                                 자다르 Zadar

자다르는 크로아티아 서쪽 달마티아 지방에 있는 도시이다. 남동쪽으로 115km 떨어진 곳에 스플리트가 있다. 로마제국 시대부터 문헌에 나오는 오래된 도시로, 중세에는 슬라브의 상업·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달마티아의 주도(主都)였다. 사적이 많고, 고고학 박물관도 있다. 1920∼1940년은 이탈리아 영토였고, 제2차 세계 대전 뒤인 1947년, 이탈리아와 연합군사이의 평화조약으로 유고슬라비아령이 되었다. 1991년에 크로아티아독립전쟁에서는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슬로베니아 SLOVENIA


․ 국명 : Republic of Slovenia
․ 수도 : Ljubljana (류블라냐)

․ 언어 : 슬로베니아 어

․ 종교 : 가톨릭

․ 민족 : 슬로베니아 인

․ 국경: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아티아를 접하고 있음

․ 주요도시 : Ljubljana, Triglav (트리글라브) Postojna (포스토이나), Bled (블레드)

․ 화폐단위 : Euro 1 = 1,370 (2021.12.)


[개 요]


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작은 유럽의 신생국가이다. 구 유고 연방 공화국이 전쟁과 대량학살에 시달리는 동안 슬로베니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2004년 5월 1일부로 유럽연합(EU)에 가입해 경제, 사회적으로 개방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다. 인구 200만의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과거 공산국가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자유롭고 여유있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나라이다. 주변 국가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산, 호수, 성, 알파인 숲, 동굴, 목초지, 해변, 섬 등 아름다운 경관으로 가득한 나라이다. 이 곳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고 물가도 저렴하여 한가로이 자연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격이다. 이 나라의 수도는 류블랴나로 베니스에서 차로 두시간, 비엔나로부터 세 시간 반 거리에 위치해 있는 동부 알프스 길목에 있는 바로크풍의 도시이다.

[지 리]

유럽 중앙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이스라엘이나 웨일즈 정도의 크기로 동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아드리아해, 이태리,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형으로 줄리앙 알프스가 있는 북서부의 해발고도가 가장 높고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높은 곳은 트리글라브 산(2900m)이다. 들쭉날쭉한 알프스 산맥은 오스트리아 국경을 따라서 동쪽으로 뻗어 있고 디나릭 산맥은 남동쪽으로 크로아티아 해안을 따라서 이어진다. 슬로베니아는 녹지가 많은 나라로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가 숲으로 덮여 있다

[기 후]

슬로베니아는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산악지형이라서 세 종류의 기후 지역이 나타난다. 지중해 남서부 지방은 알프스-디나릭 산맥이 걸쳐져 있고 중부는 알프스 기후가 저지대와 알프스 산맥에서 나타나고 북동부는 대륙성기후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연중 기온은 지중해연안에서는 12°C, 그리고 산악지방에서는 0°C이다. 대륙에서의 강우량은 연중 800mm미만이고, 산악지방에서는 3200mm이상이다.

                                                                                                             류블랴나 [ Ljubljana ]

슬로베니아의 수도. 알프스산맥과 지중해 사이 슬로베니아 중부에 위치해 있으며 류블랴니차 강(Ljubljanica R.) 하구에 자리 잡고 있다. 슬로베니아의 문화, 사회, 경제, 정치 및 행정 중심도시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1335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왕가의 통치를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잠시 프랑스 일리리아 지방의 주도이기도 하였으며, 합스부르크왕가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크라니스카(Kranjska) 공국의 수도로 중세시대 말 슬로베니아의 문화중심지가 되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됨에 따라 유고슬라비아왕국의 슬로베니아지역의 비공식적인 수도가 되었고, 1929년 유고슬로비아왕국의 드라브스카 바노비나(Dravska banovina)의 공식적인 중심도시가 되었다. 1941년에는 이탈리아에, 1943년에는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슬로베니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수도가 된 이후 현재까지 슬로베니아의 수도이다.




                                                                                                                  블레드 Bled


알프스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블레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적인 흥미를 모두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로 수도 류블랴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54km 정도 떨어져 있다.1004년 4월 10일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브릭센의 주교인 알부인 1세에게 하사하면서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1278년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1세 황제가 보헤미아의 왕인 오토카르 2세를 격파하면서 크란스카 지방을 획득하게 된다. 1364년부터 1919년까지는 펠데스(Veldes)라고 불렀으며 그 당시에는 크란스카 공국의 일부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였던 1809년부터 1816년까지는 일리리아 주에 속해 있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으며 왕실의 여름 거처로 사용되었다. 1947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별장이 건설되었고 1996년 독립된 지방 자치체로 승격되었다. 관광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관광지 가운데 한 곳으로 빙하 활동으로 인해 형성된 호수인 블레드 호로 유명하며 블레드 호 주위에는 바위로 만든 블레드 성이 있다. 온난한 기후 때문에 유럽의 수많은 귀족들이 방문했으며 오늘날에는 스포츠 활동(골프, 낚시, 승마)을 즐기려는 관광객들과 인근에 있는 산을 오르려는 등산객들이 몰린다. 블레드 호 안에 있는 블레드 섬은 플레타나(pletana)라고 부르는 나룻배를 타고 갈 수 있다. 블레드 섬에는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이 있는데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지는 종을 울리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블레드 섬에는 선사 시대에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인 지바(Živa)의 성지로 여겨졌다. 블레드 섬에는 계단 99개가 있으며 전통적인 결혼식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등 위에 오른 채로 계단 99개를 오른다. 이 때 신부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 침묵해야 한다.


포스토니아 Postojna





피브카강(Pivka R.) 북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편리한 교통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Ljubljana),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Trieste), 크로아티아의 리예카(Rijeka) 간의 전략적인 요지로 오랫동안 노트라니스카(Notranjska)지역의 주도였다. 소비치(Sovič) 언덕 끝을 따라 도시가 처음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철도 건축과 더불어 주변분지로 확장되었다. 수도 류블랴나에서 남쪽으로 50km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로 고작 1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나, 세계 2번째로 큰 카르스트 동굴을 보기 위해 세계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보통 류블랴나에서 당일 코스로 이곳을 찾고 있으며 류블랴나에서 기차나 버스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데, 기차로는 약 1시간이 버스로는 45분 정도가 소요된다. 또 겨울에는 이곳 포스토이나에서 6km 떨어진 칼리츠에 있는 스키장을 찾아 겨울스포츠를 즐기는 관광객들도 줄을 잇고 있다.

                                                                                                  포스토이나 야마 동굴 (Postoja Jama Cave)

포스토이나 동굴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긴 카르스트르 동굴로 현재까지 20km의 통로가 발견되었다. 일반에게 공개된 동굴은 전체 구간 가운데 5.2km 만 가능한데, 동굴기차로 2km 씩 왕복하고 걸어서 1.2km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1시간 30분 정도 관람한다. 1980년대 한 해 약 9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였고, 최근에는 연간 50~60만 명의 관광객이 이 동굴을 방문한다. 최초의 동굴열차는 1872년 부설되었고, 이를 통하여 오늘날 하루 1만 4천 명의 관람객이 이 동굴을 방문한다. 동굴열차를 타고 2km 쯤 들어가면, 넓고 화려한 공간에 동굴 기차가 정차한다. 이 곳에서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으로 진행하는 가이드를 따라 팀을 만들어 설명을 들으며 관람한다.(1.2km) 세계1차 대전 중 러시아 포로들이 세운 Russian Bridge -Beautiful Cave, 흰 석순의 White Chamber, 붉은 석순의 Red Chamber, 스파게티처럼 생긴 아주 작은 종유석의 Pipe Chamber, 이 동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순과 포스토이나 동굴의 상징인 Brillian Great Mountain 기슭을 돌아가면 포스토이나 동굴의 가장 큰 방인 Concert Hall에 도착한다. 포스토이나 동굴에서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허락되는 곳이 콘서트 홀이다. 콘서트 홀의 높이는 40m이고, 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으며 울림현상이 강하여 메아리가 거의 6초 동안 지속된다. 총 면적이 3,000 평방 미터나 되므로, 중요한 음악회가 이 곳에서 열리기도 한다.




                                                                                              헝가리 HUNGARY


․수도 : 부다페스트
․인구 : 약 천 40만명

․면적 : 93,031㎢ (한반도의 약 2/5)

․주요도시 : 미슈콜츠(Miskolc), 데브레첸(Debrecen), 세게드(Szeged), 페취(Pecs)

․주요민족 : 미쟈르인, 기타(독일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인)

․주요언어 : 헝가리어(마쟈르어)

․종교 : 카톨릭(67.5%), 칼빈교(20%), 루터교(5%)

․통화 : FT (1 포린트 5원) - 관광지에서 유로화 사용 가능


총인구는 1,037만 4,000명으로 1967년에 1,016만이었다.총인구의 61%가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부다페스트에는 201만 6천명, 데브레 (DEBRECEN)에는 21만 5천명, 미스콜천(MISKOLC)은 19만 5천명, 쎄게드(SZEGED)에는 18만명, 페츠(PECS)에 17만명 등 헝가리에 살고 있는 1,000만 이외에 500만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총 인구중 1.6%가 독일인, 1.1%가 슬로바키아인,0.3%가 남슬라브인, 0.2%가 루마니아인이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헝가리는 카르파티아 산맥 근처에 위치하여 있고 다뉴브 강이 헝가리를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식품,약품,의류,섬유,농업기계,가공 금속 제품, 자동차 등인데 동구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빠른 도약을 보이고 있는 나라이다.

[지 리]

유럽의 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헝가리는 카르파티아 산맥근체에 위치하여 있고 다뉴브 강이 헝가리를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총면적은 93,032㎢이다.

[기 후]

4계절을 지니고 지중해성 기후와 애틀랜타의 영향을 받는 온화한 대륙성 기후지역에 속한다. 겨울은 춥고 춥고 습기가 많으며 구름이 많이 끼고 여름은 덥다. 가장 추운 1월의 최저 기온은 -1.3℃ 이고 가장 따뜻한 7월의 최고 기온은 23.2℃이다 5,6,11월에 대체로 비가 많이 내리고 서부가 동부지역에 비해 강우량이 많다. 연중 전국의 채광량은 1,864 시간이고 부다페스트는 2,054시간이다. 연평균 기온은 10℃이다. 부다페스트의 연간 강우량은 610mm이고 습도는 80%이다.

[사회문화]

총 인구중 1.6%가 독일인,1.1%가 슬로바키아인,0.3%가 남슬라브인,0.2%가 루마니아인이다. 대략25만의 집시는 대부분 헝가리 북동쪽에 살고 있다. 언어는 핀란드어와 에스토니아어와 같이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마자르어를 사용한다. 또한 인구의 65.7%가 카톨릭,20%가 캘빈교이며 5%가 루터교이다 이러하듯 여러나라의 인종이 모여사는 헝가리는 다양한 문화와 그들만의 민속적 음악 자수등의 여러면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내세우고 있다.

                                                                                              부다페스트 Budapest

개혁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는 나라 헝가리. 공산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있는 동구권을 국가 중에도 헝가리는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바로 그 현장을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확연히 느낄수 있다. 보행자 도로인 바시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는 우아한 상점들은 동구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갖가지 상품들이 풍부하게 진열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곳에 저렴한 물가는 여행자들을 즐겁게 한다. 야경이 매우 아름다운 이 도시는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로 나뉜다.

․부다페스트 평균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0

1

6

10

15

18

20

20

16

10

3

1




부다 왕궁(Kiralyi palota)
왕국의 언덕 남쪽에 있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부다 왕궁은 부다페스트의 상징이다. 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는 않지만 역사 박물관 헝가리 노동운동 박물관 국립 미술관은 공개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왕궁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50년대에 완성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복구하면서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이 유물들은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노동운동 박물관에는 헝가리 투쟁운동과 사회주의 아래의 헝가리의 모습을 담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국립미술관에는 11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현재까지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왕궁의 북쪽으로는 빈의 문광장이 있다.
어부의 요새(Halaszbastya)
어부의 요새는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뾰족한 고깔 모양의 일곱 개의 타워로 설계되어 있고 각 타워들은 수천년전에 나라를 세운 일곱 개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 하얀색의 화려한 성벽과 마차시 교회까지 뻗어있는 계단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이 요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옛날에 어시장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설이고, 다른 한 가지는 18세기에 어부들이 성벽에서 적군을 방어했다는 설이다. 이 곳에서는 다뉴브 강변의 아름다운 페스트 지구의 도시와 후방의 헝가리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마챠시 교회(Matthias Templon)
13세기에 지어진 고딕식 건물로 역대 헝가리 왕들이 대관식을 올렸던 곳이다. 마차시라는 이름은 1470년 마치시왕의 명령으로 교회 첨탑이 증축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16세기에 부다가 터키에 점령당하면서 모스크로 변했다가 17세기에 다시 카톨릭 교회로 돌아왔고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그 후에 슈레크의 개축으로 본래의 모습인 고딕양식을 기본으로 한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역사적인 이유로 내부는 이슬람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여러가지 원색 타일을 사용한 지붕과 내부장식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여름철의 금요일 미사때는 리스트와 코달리의 음악이 연주 되기도 한다.
국회의사당(Orszaghaz)
다뉴브 강변의 네오 고딕 양식의 궁전같은 건물이 바로 국회의사당이다.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1884~1902년에 건축되었다. 뾰족 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으며 건물 벽에는 헝가리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에는 691개의 방이 있고 앞의 광장에는 헝가리의 영웅인 코슈트(Kossuth)와 라코지(Rakoczi)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국회의사당은 사진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놀라게 되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영웅 광장(Hosokter)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광장이다. 중앙에는 민족의 수호신 가브리엘 천사 동상이 말탄 기사들에 의해 에워 싸여 있고 그 주변에는 헝가리의 왕, 정치가, 장군 등 유명인의 동상이 주위에 나란히 서 있다.

국가적인 행사장으로 자주 이용되며 행사동안에 기념비는 군인들에 위해 호위된다.
성 이슈테판 교회(Szent Istvan Bazilika)
초대 성왕인 이슈테판을 기리기 위해 건국 1000년이 되는 1851~1906년에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의 탑은 96m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높다. 이 숫자는 헝가리의 건국해인 896년의 96을 의미한다고 한다.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내부에는 성 이슈테판의 오른쪽 손이 미이라로 만들어져 다른 유품과 함께 진열되어 있다. 1991년에는 바오로 2세 교황이 이곳에 와서 집도했을 만큼 유명한 성당이다.
겔레르트 언덕(Gellert hegy)
서울의 남산처럼 부다페스트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왕궁의 언덕 남쪽에 있는 해발 235m의 바위산이다. 왕궁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는 겔레르트 언덕 외에도 마차시 언덕, 마르노티비치 언덕 등의 완만한 언덕들이 있는데, 그중 이곳 겔레르트 언덕은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가장 전망좋은 곳으로 꼽힌다. 겔레르트라는 이름은 이태리 선교사로서 이 언덕에서 순교한 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하며, 이곳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고대에 이곳은 마녀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언덕 중턱에는 이 겔레르트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페스트 쪽에서 올려다 보면 잘 보인다. 또 1848년 혁명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돌의 성체가 있던 곳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독립을 기념하는 뜻으로 14m 높이의 모스크바쪽을 향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기도 했다.
부다페스트의 명동, 바치거리(VACI UTCA)
부다페스트의 체인교와 엘리자베스교 사이에 있는 페스트지구에 위치한 바치거리는 서방의 어느 거리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함을 지닌 부다페스트의 번화가다. 보행자 거리인 이곳에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으며, 공항과 열차역 등에서도 가까운 중심거리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곳은 모든 지하철 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근처에 데악광장역이 가까이 있다.
부다페스트 시민의 휴식처 시민공원(Varosloget)
시민공원은 여름에 가족들의 산책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안드라시 거리(Andrassy ut) 끝부분에 위치한 영웅광장은 시민공원내에서 산책할 때 시작점이 되는 곳으로 이 곳에는 헝가리 정착 1000년을 기념하여 1896년에 세워진 역사적인 조형물들을 볼 수 있다. 광장옆의 호수는 여름에는 보트타는 곳으로, 그리고 겨울에는 스케이트 타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호수 곁에 세워진 바이다후냐드 성(Vajdahunyad vara)은 1896년에 임시 건축물로 지어졌던 것으로 헝가리에서도 다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임시 건축물이었던 이 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결국 이대로 정착하였다. Allatkerti korut은 헝가리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거리로 동물원, 서커스, 놀이공원이 들어서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인 Gundel과 야외수영장 Szechenyi Baths 또한 이 이 곳에 위치해 있다.


                                                                                        폴란드 POLAND


․수도 : 바르샤바(Warszawa)
․인구 : 약 3천 800만명

․면적 : 312,683㎢ (한반도의 1.4배)

․주요도시 : 크라코프(krakow), 그단스크(Gdansk), 오치(Lodz), 로클로프(Wroclow), 포즈난(Poznan)

․주요민족 : 폴란드인(Polish 98%), 기타(2%)

․주요언어 : 폴란드어(Polish)

․종교 : 카톨릭(Roman Catholic 95%), 기타(5%)

.통화 :  폴란드 즈워티(PLN 1 :  290원 (2021.12.)


10세기 후반에 피아스타 왕조를 중심으로 통일국가를 이루어 14세기경에는 황금기를 이루기도 했으나, 18세기에는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멸망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국토의 대부분이 전쟁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아우슈비츠의 슬픈 역사도 갖지만 쇼팽과 코페르니쿠스, 퀴리부인, 바웬사 등을 낳은 나라이기도 하며, 경제 성장을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지 리]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도상에는 동유럽으로 표시된다. 폴란드는 동쪽으로는 부그강을 경계로 하여 리투아니아 공화국과 벨라루시 공화국,러시아 공화국,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이웃해 있고 서쪽으로는 오데르강, 나이세강을 경계로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며 북쪽은 발트해를 접하고 있다. 국토의 모양은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영토면적은 312,683제곱Km(한반도의 1.4배)이며, 영해는 12해리,경제수역은 200해리이다.

[기 후]

기후는 대체로 서유럽의 습도가 높은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가 교차하여 동시에 두 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다. 4계절이 나타나며 여름을 제외하고는 대륙성 고기압으로 한랭건조한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12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로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3월부터 6월까지는 봄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날씨가 나타난다. 6월부터 9월까지는 여름으로 매우 덥지만 밤에는 서늘한 편이다. 비가 자주 내리고 천둥이 친다. 9월과 10월의 가을 날씨는 햇볕이 따사롭고 건조하다. 특히 가을 산림지역은 매우 아름답다.

[사회문화]

종교는 95%가 로마카톨릭을 믿으며 그 외에 그리스정교, 프로테스탄트교, 이슬람교, 유대교등을 믿고 있다. 언어는 국민의 98%가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구는 약 3천8백만명이며 폴란드인이 97.6%, 독일인이 1.3%, 우크라이나인이 0.6%, 벨로루시인이 0.5%를 차지한다.

                                                                                                         바르샤바 WARSZAWA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바르샤바의 80%가 파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복원되었다. 여러 관광거리가 있는데 열차로 도착하게 되면 가장 먼저 구경하게 되는 바르샤바 중앙역, 문화 과학 궁전, 바르샤바 대학, 와이엔키 공원, 사스키 공원과 비스와 강의 시레나 인어상 등이 있다.

․ 바르샤바 평균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1

-1

2

7

13

16

17

17

13

8

2

0

평균강수(㎜)

27

25

30

38

50

66

76

71

45

40

38

35




구시가지(Strare Miasto)
구시가지는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포드웨일 거리의 오른쪽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시장이 있다. 이 곳도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었다가 15세기의 외관으로 복구되었다. 구시가지 광장에는 레스토랑, 술집, 카페와 관광객을 상대로 선물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다.
국립 박물관(Musium Narodowe)
13세기에 Masovian 왕자에 의해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으로 16세기에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왕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96년 폴란드의 수도가 크라카우에서 바르샤바로 이전된 후 이 성은 왕의 거주지로 이용되었다. 1599년에서 1619년, 1740년에서 1747년 두 번 재건되었고 세계 대전 중에는 대통령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세계 대전중 폭격당해 화재로 피해가 매우 컸고 바르샤바에서 반란이 일어난 후인 1944년 독일인들이 건물 전체를 폭파하였다. 그러나 전쟁 후 이 성은 꾸준히 복구되어 1974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화 과학 궁전(Palac Kultury i Nauki)
1955년 건립된 건물로 데필라트 광장에 있으며 바르샤바의 주요 명소중 하나이다. 37층에 탑높이는 234m이고 전망대는 오전 9시부터 7시까지 개방된다. 이 건물은 폴란드와 구소련의 우정에 대한 구소련 연방의 선물로 건물안에는 3개의 영화관, 4개의 극장, 2개의 박물관과 연구소, 그리고 스포츠 센터와 같은 편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데필라트 광장은 바르샤바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군대 퍼레이드나 다른 행사가 열린다.
와이엔키 공원(Park Lazienkowski)
와이엔키는 '욕탕'이란 의미로 건물내에 훌륭한 욕탕이 여러 개 있어서 븥여진 이름이다.이 공원은 18세기에 폴란드 최후의 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에 의해 30년 동안 만들어졌다. 포니아토프스키 왕 사망후 러시아에 매각되었다가 다시 폴란드로 소유권이 되돌아 왔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유물이 독일로 반츨되었다. 또한 화재등으로 인해 건물이 많이 손상되었었으나 전후 복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갖가지 꽃들과 나무로 가득차 있으며 새와 동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공원안에는 왕의 여름 별궁으로 세워진 와이엔키 궁전(Palac Lazienkowski)이 있고 광장의 연못 기슭에는 쇼팽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름철에는 매주 일요일 정오부터 쇼팽 콘서트가 개최된다.
바르샤바 대학 (Warszawa University)
1818년에 창설되어 폴란드에서는 크라쿠프의 야기에오 대학 다음으로 오래된 대학이다. 대학내에는 코페르니쿠스 상과 미츠키에비치 상, 코슈스코 상이 있다. 코페르니쿠스상은 1830년에 세워졌고 2차 세계대전때 훼손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재건되었다.
쇼팽의 생가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약 54킬로미터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라는 작은 마을안에 있다. 프레데릭 쇼팽이 1810년에 태어난 곳으로 전세계에서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찾는 장소이다. 쇼팽의 생가는 한적한 공원안에 위치해 있으며 이 건물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9시부터 5시까지 개방되며 쇼팽의 사진과 악보, 악기 가구등을 전시하고 있다. 여름철에는 쇼팽을 기념하는 피아노 콘서트가 5월에서 9월까지 열린다.
인어 동상(pomnik Syreny)
인어는 바르샤바의 상징이다. 바르샤바에는 2개의 인어 동상이 있다. 그 중에서 Vistula 강의 서쪽둑에 있는 인어상이 더 유명하다. 다른 인어상은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다.


                                                                                                            크라카우 KRAKOW   

수천개의 건축물과 예술품들로 가득차 있는 있는 크라카우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있는 도시이다. 폴란드에서는 드물게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교통의 중심지이며 여러지역으로 여행하기에 편리하다. 급속도로 공업화되어 공해가 심각한 편이다. 특히, 가까이 있는 아우슈비츠로 인해 더욱 유명하고 체코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다.


바벨성(Zamek krolewski na Wawelu)
도시 남쪽 비스와강 상류에 위치하며 성의 역사는 9세기 초부터 시작된다. 성 내부에는 중세때의 갑옷,검, 장신구,초상화등을 전시하고 있다. 근처에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화재 후에 고딕 양식의 바벨성은 1502년부터 1536년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주변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고 문 네 개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복도가 있다. 바벨성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바벨 대성당은 세 번째의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20개의 예배당 가운데서 황금색의 돔으로 덮힌 지그문트 예배당(Kaplica Zygmuntowska)은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폴란드 왕의 석관과 가치있는 예술품들이 있다. 그리고 지하에는 폴란드 왕과 영웅들의 묘소가 있다. 대성당 탑에 올라가면 특별한 경우에만 울리는 유명한 지그문트 종이 있다. 도시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수킬로미터까지 울려 퍼진다.
성 마리아 교회(Kosciol Najswietszej Panny Marii)
중앙시장 광장 서쪽에 세워진 성마리아 교회는 크라코프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특히 첨탑이 매우 아름다운데 뉘른베르크 출신의 천재 조각가 Wit Stwosz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12년동안 만든 것이다. 그리고 교회안의 예술상들은 12세기에서 19세기의 작품들이다.
중앙시장 광장 (Rynek Glowny)
중앙시장 광장은 크라코프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4만㎡의 넓은 광장이다. 주위에는 옛 크라코프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 있다. 광장 중앙의 건물은 직물회관으로 고딕 양식의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직물 회관 안에는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많이 잡화점이 있다. 직물 회관에는 18,19세기의 폴란드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국립 박물관의 일부가 있다.
플로리안스카 거리 (Florianska)
플로리안스카 문은 중앙광장에서 구시가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3km에 달하는 구시가지 8개의 성벽 중의 하나이다. 바르바칸이라는 방호벽이 있다.
성 플로리안스 문 (Brama Florianska)
이것은 완벽하게 남은 중세의 성벽과 탑의 일부분이다. 14세기에 만들어 졌으며 성문의 윗 층은 15세기에 첨가되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결 치는듯한 형태의 모습은 바로크 시대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성과 성문은 이 곳 폴란드만 존재하는 아주 독특한 양식으로 아주 오래동안 보존 해야만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 (Oswiecim <Auschwitz>)
크라쿠프 서쪽으로 61km 떨어진 곳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세워져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고 150만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빨간 벽돌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의 철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고 써있고 그 유명한 나치가 개발한 가스는 한 통으로 400명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소금광산(Wieliczka, 비엘리츠카)
약 10세기에 이 곳에 소금 제조장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아주 오래전에 바다였던 곳이 퇴적되면서 암염이 되어 광산이 되었다. 이곳은 몇세기 전에도 코페르니쿠스나 괴테가 다녀갈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수십개의 방에는 광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러가지 기념조각들이 있으며, 소금호수에서는 쇼팽의 음악이, 또 어떤 방에서는 폴란드 악사들의 협주를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되어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BOSNIA HERZEGOVINA


․국명 : Republic of Bosnia and Herzegovina
‧수도 : Sarajevo(사라예보)

‧언어 :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등

‧종교 : 이슬람 (40%) 세르비아정교(36%)

․민족 : 보스니아 무슬림계,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 등

‧주요도시 : Sarajevo(사라예보), ,Mostar (모스타르)

‧화폐단위 : BAM (보스니아 마르크 1)  : 685원 (2021.12.)


[개 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 동쪽 및 남동쪽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북쪽과 서쪽은 크로아티아와 접한다. 이 나라는 거의 내륙 국에 가까운데, 해안선의 길이는 네움 시를 중심으로 한 아드리아 해 26km가 고작이다. 국토 내륙에서 중앙과 남부는 산지이고, 북서부는 구릉지이며, 북동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내륙 지방의 상당 부분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눈이 많이 내리는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국토 남단 끝 지역은 평야 지대로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소위 '구성 민족'이라 하여 세 민족 집단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은 보스니아인이며, 두번째는 세르비아인, 마지막으로 크로아티아인이 있다. '헤르체고비나'와 '보스니아'라는 용어는 민족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지명으로 쓰인다.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중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전 영토의 51%)과 세르비아인 중심의 스릅스카 공화국(49%)으로 사실상 갈라져 있다. 또 양측이 관리하는 브르치코 행정구가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전쟁 와중에 독립을 얻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시장 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과도 선상에 있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라는 유럽 연합의 회원국 잠재 후보국으로서, 2010년 4월에 탈린 정상 회의에서 가맹 행동 계획을 부여받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 후보국이 되었다. 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02년 4월 24일부로 유럽 평의회 회원국이며, 2008년 6월 13일에 설립한 지중해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다.

[사회문화]

보스니아의 언어는 남슬라브어군으로 유고, 크로아티아와 같이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고 로마 및 키릴문자를 병용하고 있으며, 중세이후 주변국의 지배를 받아온 역사적 이유로 이슬람화된 보스니아인, 세르비아 정교를 신봉하는 세르비아인 및 카톨릭의 크로아티아인이 공존하여 문화적 다양성 보유하고 있다. 다민족, 다종교 사회로 민족간 다양한 문화적 전통이 상호 복잡하게 얽혀 있어 통일된 국민성을 찾기가 어려우며, 1992 ~ 1995년간 내전에서 각계파간 '인종청소'를 자행, 민족 간 거주지가 뚜렷이 구별되는 등 상호갈등이 남아있기도 하다.

                                                                                                              사라예보 Sarajevo

전쟁 전의 사라예보는 모스크와 시장 아름다운 전경을 가진 터키식 바자르가 있는 풍부한 역사의 장으로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였다. 도시의 강가는 여전히 1914년 Archduke Francis Ferdinand 여기에서 삶을 마치는 그 운명적인 날 이래로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70년이 지난 후에 사라예보가 다시 1984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00년 동안 사라예보는 이슬람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과 유대인과 또 다른 이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했지만, 관용의 전통은 세르비아인의 대포에 의해서 파편 속에 부서졌다. 최근의 전쟁동안 10000명의 사람이 죽었고,5000명이 부상당했다. 3년의 잔인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는 다시 안정 상태에 도달한다. 트램이 움직이고 많은 카페와 호텔들이 다시 문을 열고, 여행객들이 조금씩 도시를 채우기 시작했다. 최초의 방문객들은 인류의 종말과도 같은 전쟁의 그 엄청난 폐해를 보여주는 장소를 최초로 보고자 하는 '전쟁그룹'들이었다. 행운과 시간을 두고 사라예보는 다시 찬란한 대도시로 태어날 것이다.

* 사라예보 평균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

-0.9

1.8

5.6

9.8

14.4

17.3

19.2

19.2

15.9

11.1

5.7

0.4

평균강수(㎜)

71

67

70

74

82

91

79

71

70

77

94

85




라틴 다리
밀야츠카 (Miljacka) 강 위에 1798년 세워진 라틴 다리는 밀야츠카 강을 가로 지르는 13개의 다리 중의 하나이지만, 이 곳에서 제 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이 일어나 유명해 진 다리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비밀결사 조직 단원 중 한 명인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는 라틴 다리 옆 길목에 있는 모리츠 실러 카페 안에 있다가 황태자를 향해서 총을 발사했고 황태자 부부는 사망한다. 모리츠 실러 카페는 현재 사라예보 시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슈카르 지아 ( Bascarsija )
사라예보 구거리(스타리 그라드 Old City)의 중심인 바슈카르지아. 자갈과 대리석으로 깔아서 만든 (판석 포장) 터키 직인의 거리는 이슬람 정취가 느껴지는 거리이다. 415년간 오스만투르크 (터키) 지배 당시 터키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로, 터키 직인들로부터 들어온 금속공예 기술을 그대로 간직한 거리이다. 지금도 가게안에서 금속공예 세공을 직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곳에 68개 직종의 500여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가지후스레브베그 모스크
오스만투르크 지배 당시인 1530년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가지후스레브베그의 지시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사라예보 이슬람사원을 대표하는 건축물 이다. 가지후스레브베그는 오스만이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당시 터키인으로 모스크와 학교, 도서관 등의 시설을 많이 지은 사람이다. 가지후스레브베그 모스크는 1992년 ~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많이 손상되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으로 1996년 복원되었다.


                                                                                                               모스타르 Mostar

모스타르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으며,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강(江) 연안에 위치한다. 주변 일대에서 포도 ·과일 ·잎담배가 재배되고, 담배 ·섬유 ·목재가공 ·비행기 공업도 활발하다. 또 부근에 있는 석탄 ·보크사이트 채굴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중세 건축물이 많으며, 로마 시대의 성(城), 1556년 건설된 다리, 터키령 시대의 이슬람교 사원 등이 유명하다. 1878∼1918년 오스트리아 지배 때에는 세르비아 애국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시대의 건축물과 터키 식민지 시대의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1993년 보스니아 내전으로 시내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2004년 다시 재건되었다. 현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모스타르 다리 (Stari Mostar)
오래전부터 네레트바 강 위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16세기 오스만투르크가 모스타르를 지배하면서 술탄 슐레이만 1세가 나무 다리를 헐고 석조 다리를 만들도록 지시를 했다. 1556년 오스만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Sinan)의 제자 미마르 하즈루딘 (Mimar Hajrudin)이 9년 동안 건축하여 아름다운 아치형 석조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의 폭 5m, 높이 24m, 길이는 30m이다. 모스타르 다리는 보스니아 내전 중인 1993년 11월 9일 10시 15분 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 부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파괴된 다리는 여러 나라의 지원금과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의 지원금으로 2004년 7월 23일 복원되었다. 스타리 모스타르는 2005년 7월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바냐루카  Banja Luka

사라예보에서 북서쪽으로 150km 떨어진 브르바스강(江) 연안에 있다. 투르크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군사요충지였고, 1588~1638년에는 보스니아의 수도였다. 주철 ·공업기계 ·식품 ·양조 ·담배 등의 공업이 성하며, 근교에는 탄광이 있다. 또 북서쪽 교외에는 유황천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시대부터 거주지로 알려졌으며, 터키의 성터, 16세기의 회교사원 ·극장 등이 남아 있다.




                                                                                                          세르비아 Serbia


‧ 수 도 : 베오그라드
‧ 종족구성 : 세르비아인(82.9%), 헝가리인(3.8%), 보스니아인(1.8%), 유고슬라비아인(1.1%), 기타(10.4%)

‧ 공용어 : 세르비아어

‧ 종 교 : 세르비아정교(85%), 가톨릭교(5.5%), 개신교(1.1%), 이슬람교(3.2%), 기타(5.2%)

‧ 화 폐 : 디나르 (DINAR 1) = 12원 (2021.12.)


정식명칭은 세르비아공화국(Republic of Serbia)이다.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남동쪽으로는 불가리아, 북쪽으로는 헝가리, 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남쪽으로는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1998년 코소보-메토히야(Kosovo and Metohia) 자치주에서 세르비아 정부군이 알바니아계에 대한 무자비한 인종청소작전을 펼친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 한때 국제사회에서 완전 고립되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강대국들이 알바니아계의 독립을 지지하는 가운데 코소보 자치주는 2004년부터 유엔코소보임시행정부(UNMIK;UN Interim Administration Mission in Kosovo) 직할 통치 아래 있다가 2008년 2월 17일 분리독립을 선언하였다. 행정구역은 29개 행정구(okrug)와 1개 수도(베오그라드)로 이루어져 있다.

                                                                                             베오그라드 Beograd/Belgrade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란 ‘하얀 도시’라는 뜻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방면에서 동쪽을 향하여 흐르는 사바 강(江)이 도나우 강에 합류하는 지점 우안에 위치한다. 칼레메그단이라고 부르는 성채(城砦)가 있는 석회암대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좌 안 쪽의 저지대에 있는 제믄 지구도 편입시켜 이 지구에 신도시인 노비 베오그라드가 건설되었다. 철도·도로·항공 등 교통의 중심지로, 도나우 강의 하항으로 발전하였다. 피혁·섬유공업을 비롯하여 기계·화학·식품공업 등이 활발하며, 과학 아카데미·대학·동식물원·극장·박물관 등과 옛 궁정(宮廷)이 있다. 시(市)가 창건된 역사는 BC 4세기로 발칸 제민족 항쟁의 중심지였으나 1521년 터키가 점령한 후 1867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부터 터키 공격의 목표지였다. 그 이후는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의해 2회에 걸쳐 점령되고, 1918년 연합국과 헝가리 간의 휴전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이 때부터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고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1941년 4월 나치스 독일에 점령되어 피해가 컸으나, 시민들은 이에 적극 저항하고, 1944년 10월 소련군과 티토 수상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해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1945년 11월에 독립을 선언하고, 다시 수도로서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오그라드에서는 예로부터 자주 전쟁이 벌어졌다. 19세기 초부터 오늘에 이르는 기간까지도 거의 20년마다 파괴가 거듭되어 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평화가 유지되고 거리에는 고층건물과 상점이 늘어서는 등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거리가 건설되었으나, 과거 파괴의 역사 때문에 고대·중세의 유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볼 만한 유적으로는 로마풍(風)의 우물이 있는 칼레메그단 성터·네포이샤성·다마두파샤의 묘(墓) 등에 불과하다.


미하일로 (Knez Mihajlo Obrenovic) 왕의 거리
코네즈 미하일로 왕의 거리는 베오그라드 공화국 광장에서 칼레메그단 요새 공원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거리 이다. 베오그라드 최고의 번화가인 이 거리에는 유명브랜드 제품을 파는 상점들과 쇼핑몰, 레스토랑, 노천카페 등이 밀집되어 있다.
스카다리아 거리


19세기 세르비아 예술인들의 활동무대이자 보헤미안의거리 스카다리아 지역
칼레메그단 요새 Kalemegdan Fortress
강력한 요새이자 베오그라드 시의 상징. 이 장소에는 1세기 로마가 지배했던 시절부터 요새나 성이 서 있었으며, 모든 것이 그 역사적인 자취를 남겨 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요새는 많은 부분이 1740년대에 세워졌으나, 그 기원은 12세기로 예전에 파괴되어 버린 건물 위에 지어졌을 때였다. 성벽은 아직도 오래된 베오그라드 시의 경계선을 나타내고 있다. 칼레메그단 요새는 비잔틴 인이 지었으며, 이 분쟁 지역이 여러 명의 다양한 통치자의 지배를 받는 것을 목격했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지배자들을 전복시켜 버린 1521년 이후, 요새는 방치되어 황폐해졌다. 18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가 20년 이상 지배했으며 군사를 두기 위해 요새를 수리했다. 이후 양차 세계대전이 요새를 손상시켰으나, 다시 수리되었다. 오늘날 칼라메그단 요새는 오랫동안 침략을 받은 베오그라드의 역사와 나토의 폭격에도 여전히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자랑스러운 상징으로 남아 있다. 요새의 벽 모든 곳에 남아 있는 전투의 상처는 전쟁에 시달린 베오그라드의 과거를 보여준다.


                                                                                      몬테네그로 MONTENEGRO


· 수 도 : 포드고리차(Podgorica, 16만 명)
· 인 구 : 657,394(2012.2 기준)

· 면 적 : 13,812㎢(한반도의 1/7수준)

· 인 종 : 몬테네그로계(43%), 세르비아계(32%), 보스니아계(8%), 알바니아계(5%), 기타(12%)

· 종 교 : 정교(69.1%), 이슬람(19.1%), 가톨릭(4.4%), 기타(7.4%)

·독립일 : 2006.6.3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연합에서 독립)

.통화 : 유로 (EURO 1) : 1,370원 (2021.12.)


몬테네그로(Montenegro)는 1918년 니콜라 왕정을 끝으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뒤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흡수되고, 1946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6개 공화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1992년 1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등 4개 공화국이 독립하면서 유고연방이 해체되었고, 그해 4월 세르비아공화국과 함께 신(新)유고 연방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몬테네그로는 꾸준히 세르비아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추구해 왔으며, 2006년 6월 5일 마침내 신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여 지금의 국가를 건국하였다.

                                                                                                                    코토르 Kotor

몬테네그로 코토르(Kotor) 만에 위치한 해안도시로 중세 세르비아 네만리치(Nemanjić) 왕가에 의해 지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이곳에 요새가 건립되었다. 1002년 제1차 불가리아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1420년- 1797년 베네치아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538년-1571년과 1657년-1699년에는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는 이탈리아에 통합되었다. 1945년 이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의 몬테네그로 도시로 편입되었다. 1979년 몬테네그로 해안지역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구시가의 50%가 파괴되었고, 성 트리폰(St. Tryphon)성당이 상당부분 파괴되었다. 몬테네그로에서 잘 보존된 중세도시 중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베네치아공화국의 오랜 통치를 받아 도시 곳곳에서 이 시대를 반영한 건축물들 볼 수 있다. 주요 유적으로는 1166년에 건립된 성 트리폰(St. Tryphon)성당, 4.5km에 달하는 고대 성벽, 브베티 조르제(Sveti Đorđe)와 고스파 오드 슈크르피엘라(Gospa od Škrpijela) 등의 작은 섬들 및 구시가(old town) 등이 있다.




                                                                                           루마니아  ROMANIA


수도 : 부쿠레시티(Bucharest, 235만명)
인구 : 약 2천 300만명

면적 : 237,499㎢ (한반도의 1.1배)

주요도시 : 브라쇼브(Brasov), 티미소아라(Timisoara), 콘스탄짜(Constanta)

주요민족 : 루마니아인(Romanian 89%), 헝가리인((Magyars 7%)

공용어 : 루마니아어(Romanian)

종교 : 루마니아 정교(Romanian Orthodox Church)

화폐 : 루마니아 레우 (RON 1) : 270원 (2021.12.)


지리


발칸반도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북부로는 러시아, 북서부에는 헝가리, 남서부로는 불가리아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부는 흑해에 접해있다. 면적은 23만 7500㎢ 정도로 한반도 전체면적보다 약간 넓다. 인구는 2300만 정도인데, 둥그스름한 국토를 가진 루마니아는 산과 고원과 평야가 거의 3분의 1씩을 차지한 지형적으로 균형을 이룬 나라이다. 국토의 중앙을 달리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사이에 두고 넓이가 거의 같은 세 개의 지방 몰다비아, 발라키아, 트란실바니아로 나뉘어 있다.

기후

위도가 북위 45도나 되지만 기후는 전반적으로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산간지대는 강우, 강설량이 많은데 비해 평야지대는 한발이 심하다. 우리나라처럼 4계절의 구별이 뚜렷하다. 겨울은 추위가 심하여 평균 -3도, 여행에는 온난한 3-10월이 알맞다. 여름에는 하루종일 온도가 높지만 습도가 낮기 때문에 불쾌감은 없고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해지므로 긴소매 옷을 잊지말고 준비해야 한다.

사회와 문화

루마니아는 소련 경제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한 '동유럽이 이단아'로서 곤경을 겪어왔다. 더군다나 차우세스쿠 일당의 폭정 때문에 국내경제는 악화될 때로 악화되었으며, 식량사정마저 동유럽에서 제일 나쁜 형편이다.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개방화의 실익을 거둘지가 숙제이다. 한국과의 교역량은 아직 미미하다. 한국이 300만 달러를 수출하고, 1800만 달러 어치를 수입함으로써 무역 적자를 내고 있다.(1988) 앞으로 교역량은 급속도로 확대될 전망이다.

인종과 언어

인구는 약 2300만정도로 인구의 대부분이 라틴계 루마니아인이고, 헝가리인, 독일 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집시 등이 약간씩 섞여 있다. 일반적으로 반소감정이 강한 국민이며, 총인구의 10퍼센트 가까운 소수민족 문제가 골칫거리이다. 루마니아의 언어는 라틴어 계통의 루마니아어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가깝다. 보통 로망스어계로 분 류한다. 언어 사용빈도는 공용 어로서 루마니아어를 주로 사용하며 상용어는 영어와 불어가 있다. 공항이나 호텔 등 관광관계 업소에서는 영어나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 등이 통한다.

종교

그리스 정교의 분파로 루마니아 정교가 있다.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는 국민이 많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종교적인 행사가 정착해있다.

                                                                                                        부쿠레슈티 Bucharest

영어 명은 부카레스트(Bucharest)이다. 고고학상의 발견으로 오래된 도시임이 확인되고 있으나 이곳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59년에 루마니아 공국(公國)의 블라드 체페슈왕(王)이 요새를 만들었을 때로 되어 있다. 그 후 문테니아(왈라키아) 지방의 군사·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으며, 17세기부터는 루마니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848년의 혁명, 1859년의 국가통일 등의 정치적 사건 때의 무대가 되었으며, 1862년에는 통일 루마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중심가의 근대적 고층건물과 변두리의 빈민가가 심한 대조를 이루는 발칸적 양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를 못했다.


차우셰스쿠 의회 궁전 [ Parliament Palace ]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부쿠레슈티에 짓도록 명했던 엄청난 대 건축물이다. 이 거대한 건물을 짓느라 부쿠레슈티의 역사적인 중심 지역 20퍼센트가 파괴되었고, 1984년에서 1989년에 걸친 루마니아 국민총생산의 30퍼센트가 여기에 소비되었다. 14층의 이 건물에는 3,200개의 방이있으며, 3,500톤의 크리스탈과 90만 톤의 나무로 이루어졌다. 차우셰스쿠가 1989년 처형당할 무렵, 건물은 80퍼센트가 완공되어 있었다. 그의 사후 10년간 이 건물을 대체 어떻게 할까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 이 건물은 컨퍼런스 센터이자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크레출레스쿠교회 [ Kretzulescu Church ]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독립교회로 빅토리에 거리에 위치한 18세기 교회이다.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레출레스쿠(Iordache Kretzulescu)와 그의 아내 사프타(Safta)가 세웠고 루마니아의 유명한 화가 게로게 타타레(Gheroghe T attarescu)가 내부 벽화를 그렸다. 1720부터 1722년 사이에 건물이 세워졌지만, 내부의 벽화는 그보다 100여 년 뒤인 1859년부터 1860 사이에 그려졌다.
루마니아 민속 박물관 [ Muzeul Satului ]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야외박물관으로 1936년에 개장하였다. 루마니아 각 지역에서 역사적,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전통 민속 건축물을 원상태 그대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는데, 전통 농촌 가옥과 물방앗간, 풍차제분소, 가축 우리, 교회, 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루마니아 북서부 마라무레슈(Maramures) 지역의 전통적인 목조교회는 순수하게 나무로만 지은 것으로, 독창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전통 가옥의 내부에는 당시 루마니아 시골의 일상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순박하고 아름다운 살림살이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개선문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축조한 석조로 된 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무에다 겉을 석회로 바른 것을 다시 새로 지은 것이다. 주변에는 별다른 건물도 없어서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빅토리아 광장
부쿠레슈티의 중심이다. 옆에 빅토리아 궁전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9개의 거리가 사방으로 거리가 나있다. 마치의 로마의 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거리다. 중심 번화가가 여기서 시작 된다. 박물관과 공공 건물 등 주요 관공서와 극장 등이 이곳에 모여있다.
국립 미술관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으로 소장되어 있는 미술품만도 11만점이 넘는다. 주로 루마니아 화가들의 작품이 많다. 특이하게도 복도의 의자에 앉아서 관람하는데 덧신을 신고 관람하도록 하고 있다.
부쿠레슈티 역사 박물관
빅토리아 거리에서 남쪽을 쳐다보면 한눈에 보이는 건물이다.루마니아 현대에 선사 시대에서 위로 루마니아어 역사적 유물을 포함. 박물관은 우표 박물관 도 있는 구 우정청 내부에 있다. 8,000평방미터가 넘는 면적에 박물관은 약 60개의 전시실. 영구 전시품에는 Trajan's Column 전체의 석고 캐스트 , 루마니아 왕관 보석 및 Pietroasele 보물이 포함된다. 건물은 1892년에 승인되었으며 건축가 Alexandru Săvulescu 는 우편 검사관 Ernest Sturza와 함께 설계를 위해 유럽의 다양한 우편 시설을 견학하도록 파견되었다. 최종 스케치는 주로 제네바에 있는 우편 시설의 영향을 받았다. 절충주의 스타일로 지어졌으며 높은 지하실과 3개의 위층에 큰 베란다가 있는 직사각형 이다. 석조 파사드는 10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지지하는 포르티코와 건물 전체에 걸쳐 12개의 계단으로 구성된 플랫폼이 특징이다. 박물관은 광범위한 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며 부분적으로만 개방되어 있다. 중세 후기 고고학 유적지가 건물 아래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브라쇼브 Brasov

루마니아 브라쇼브주(州)의 주도(州都). 독일어로는 크론슈타트(Kronstadt)라고 한다. 카르파티아산맥의 북쪽 기슭에 위치하는 도시이며, 몰다비아·왈라키아·트란실바니아의 세 지방을 잇는 교통·상업의 중심지이다. 기계공업의 중심지 중 하나로, 트랙터·자동차·베어링 등을 제조하는 공장이 있는 동시에 섬유·제재·식품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공과대학·오페라극장(국립) 등이 있으며, 14∼15세기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검은 교회’가 유명하다. 13세기에 독일 이주민이 건설한 이래로 시(市)는 옛 시내의 시 참사회당(參事會堂)과 검은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루마니아인은 오랫동안 시내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시외에 살고 있던 루마니아인이 세력을 확장하여 차츰 옛 시내에서의 영업권과 거주권을 획득하여 19세기에는 루마니아인의 교육·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루마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검은 교회 [ Black Church ]
1384년, 독일인 마을에서 '검은 교회'의 건축을 시작했다. 이 교회는 원래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었는데, 16세기에 트란실바니아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 요한네스 혼테르에 의해 루터파 교회로 개종되었다. 1689년 '대 터키 전쟁' 동안 합스부르크 군대가 이 도시에 쳐들어왔을 때 교회는 불에 타 그 일부분이 손상되었다. 이때 연기로 피해를 입어 벽이 새카맣게 그을렸는데, 이후로 '검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브란성 [ Bran Castle ]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의 가상모델인 블라드 3세가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졌다. 1212년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는데, 15~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공국을 잇는 연결지 역할을 하면서 오스만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건물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시나이아 Sinaia

'카르파티아의 진주'라 불리는 루마니아 최고의 산악 휴양 도시다. 프라호바 계곡 근처 산악지대에 위치해 자연경관이 좋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어 루마니아 사람들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이 찾아든다. 시나이아라는 도시 이름은 인근에 있는 시나이아 수도원에서 따온 것이며, 시나이아 수도원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시나이 산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까지 시나이아는 성스러운 이름의 수도원이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의 읍이었다. 이곳이 루마니아 최대 휴양지로 바뀐 것은 19세기 말, 카를 1세의 여름 별궁인 펠레슈 성이 생기면서부터다.


시나이아 수도원 [ Sinaia Monastery ]
왈라키아 공국의 귀족인 미하이 칸타쿠지노(Mihai Cantacuzino)가 1695년에 세웠다. 시나이반도 시나이산에 있는 대시나이 수도원에서 이름을 따왔다. 또한 이 수도원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을 시나이아라고 부르게 되면서 도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과거에는 칸타쿠지노 집안의 여름 별장으로 쓰였으며 현재는 20여 명의 정교회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펠레슈 성 [ Peleş Castle ]
카롤 1세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이 성은 그의 마지막 휴식처가 되었다. 현재 독일 땅의 남부에 있는 지크마링겐에서 태어난 카롤 1세는 1881년 새로이 태어난 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 차우셰스쿠의 공산주의 정권이 지배할 동안 이 지역 전체는 닫혀 있었고 아름다운 성도 거의 사용되는 일이 없었다. 1989년 12월에 일어난 혁명 이후 차우셰스쿠는 타도되었고, 펠레슈성은 다시 관광객들에게 문을 열어 성에 있는 많은 눈부신 방들과 가치 있는 소장품들을 선보이게 되었다.


                                                                                   불가리아 BULGARIA


․ 국 명 : 불가리아공화국, The Republic of Bulgaria
․ 면 적 : 1만 1910㎢

․ 수 도 : 소피아

․ 언 어 : 불가리아어, 터키어, 마케도니아어

․ 종 교 : 불가리아정교, 이슬람교, 가톨릭교

․ 통 화 : 불가리아 레프 (LEV 1) = 685원 (2021.12. 기준 / 관광지에서 유로화 사용가능)


[ 개 요 ]

동부 유럽 발칸반도의 남동부에 있는 나라로서 터키와 접경한다. 북쪽은 도나우강을 국경으로 루마니아와 접하고, 동쪽은 흑해, 남쪽은 터키와 그리스, 서쪽은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터키의 동유럽 진출 통로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에 1396년부터 50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78년 러시아· 투르크 전쟁 결과 자치공국이 되었고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1945년 공산당이 집권하고 1946년 왕정 제를 폐지하여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89년 동유럽 민주화의 영향으로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1991년 신헌법을 채택하여 불가리아 공화국이 되었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농업을 주산업으로 한다. 일찍이 소련을 모방한 경제체제를 택하여 농업집단화를 1958년에 완수하였다. 이후 생산의 양적 확대에서 질적 향상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1984년 3월의 당대회에서는 제품의 질적 향상을 위한 기업의 독립, 가격제도의 개혁 등 자유화노선을 택하였다.

                                                                                                   소피아 Sofia

불가리아의 수도로, 해발고도 550m 지점에 위치한다. 도나우 강(江)으로 흘러드는 이스쿠르강의 두 지류가 시내를 흐르며, 배후에 산을 등지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푸른 숲이 우거진 공원이 많아 ‘녹색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 된 도시의 하나로, 고대에는 트라키아인(人)의 식민지였다. 29년 로마에게 점령된 후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는 군사근거지가 되었으며, 당시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그 후 고트족(族)과 훈족에게 파괴되었으나,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특히 이곳은 슬라브족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성채로 큰 몫을 하였다. 809∼1018년 불가리아 제1왕국, 1194∼1386년 비잔틴, 14세기 말부터는 투르크의 지배하에 놓여 발칸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지점이 되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에게 점령되었고, 이듬해 불가리아 인에게 넘어가 79년 수도가 되었으며, 행정·사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그 후 각 분야에 걸친 시설의 건설, 철도부설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부분적으로 받은 전쟁피해를 부흥시켰으며, 소피아 재건계획의 실천을 통해서 근대적인 대도시로 탈바꿈하였다.


반야반시 모스크 [Banya Bashi Mosque ]
1576년 오스만투르크제국 지배 당시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중의 하나이다. 소피아에는 과거 70개에 달하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바냐바시모스크만이 이슬람 사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바냐바시라는 이름은 공중목욕탕을 의미하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최고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이 설계하였다. 이 사원은 거대한 돔과 하늘까지 치솟은 첨탑으로 유명하다.
성 페트카 지하교회 [ St. Petka Samardjiiska Church ]
구 공산당 본부 앞 광장에서 바라보면 지붕만 나와 있는 교회로 오스만 투르크제국 지배 당시인 14세기에 건축되었으며 소피아에 남아 있는 중세교회 중의 하나이다. 오스만투르 크제국 지배 당시 투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었다. 외부는 타일에 덮여 있어 볼품이 없으나 내부는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다른 3개의 시대(15, 17, 19세기)의 프레스코는 예수의 출생, 기적, 고통, 십자가에 못박힘, 죽음과 부활 등의 다양한 삶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성 게오르기 교회 [ St. George Rotunda ]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로 쉐라톤 호텔의 정원에 있다. 로마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다가 터키 지배 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제국 황제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바로 성 게오르기 교회다. 이 교회는 정교한 건축물과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사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있는 불가리아 정교회 성당. 소피아 중심에서 동쪽끝에 위치해 있는 성당으로 러시아·투

르크 전쟁 (1877-1878)에서 불가리아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20만 명의 러시아 군인을 기리기 위해 1882년 착공되어 1912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명칭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이름인 Saint Alexander Nevsky 에서 유래하였다. 네오비잔틴 양식의 발칸반도 최대 성당으로 내부는 1,300㎡로서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내부는 6개의 다른 나라의 예술가와 도예가들의 작품들인 프레스코, 벽화, 거대한 샹들리제 등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벨리코투르노보 Veliko Tarnovo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주(州)의 주도(州都). 이름은 투르노보(Tŭrnovo)이다. 소피아에서 동쪽으로 240km 떨어진 얀트라 강(江) 상류에 있다. 제2차 불가리아 왕국(1185~1396)의 수도였으며, 아센 2세(1218~1241)시대에는 슬라브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불가리아의 아테네’라고 불렀다. 1393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왕국은 멸망하였으나, 이후 5세기에 걸쳐 문화·교육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1867년에는 오스만에 저항하는 무장봉기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반(反)파시즘 운동의 최대 거점이었다. 주변에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 식육·제당·통조림·우유가공·포도주 제조 등의 식품공업이 활발하다. 14세기에 세워진 성베드로 교회와 성바오로 교회, 고고학박물관·사관학교·종합대학 등이 있다. 


차레베츠 요새 [ Tsarevets Fortress ] // 벨리코투르노보 성
불가리아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arnovo)에 있는 고대요새. 차베레츠 언덕은 트라키아인과 로마인들의 정착지로, 비잔틴시대인 5세기와 7세기 사이에 이 언덕 위에 요새가 건립되었다. 요새는 8세기와 10세기에 불가리아와 슬라브인들에 의해 재건축되어 요새화되었으며, 12세기 초 비잔티움제국에 의해 다시 요새화되었다. 불가리아 제2왕정 때 최고의 부흥기를 맞이하였으나, 139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어 파괴되었다. 현재는 400개 이상의 주택, 18개의 교회, 여러 개의 수도원, 상점, 성문과 타워 등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요새의 벽을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유적들을 볼 수 있다.


                                                                                                 릴라 수도원 ( Rila Monastery )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은 10세기경 동방정교회(Orthodox Church)의 성자 반열에 오른 운둔자로 알려진 릴라의 성요한(St John)이 설립했다. 수도원을 비롯하여 성 요한의 금욕적인 삶의 은둔처·무덤은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으며, 중세 불가리아의 정신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초 화재로 훼손되어, 1834년~1862년에 재건축되었다. 불가리아 르네상스(18, 19세기) 특유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슬라브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상징적인 것으로, 불가리아에서 가장 문화적·역사적이며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유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알바니아 ALBANIA


․ 국명 : 알바니아 공화국 Republic of Albania
․ 면적 : 2만 8748㎢

․ 수도 : 티라나

․ 정치 : 의회형태 공화제, 의원내각제, 인민의회

․ 언어 : 알바니아어, 그리스어

․ 종교 : 이슬람교, 그리스정교, 가톨릭교

․ 화폐단위 : 레크(Lek 1) = 12원 (2021.12.)


[개 요]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서북부에 있는 공화국. 정식명칭은 알바니아공화국(Republic of Albania)으로, 유고슬라비아·그리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362㎞이다. 종족구성은 알바니아인 95%, 그리스계 3% 등이다. 언어는 알바니아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이슬람교 70%, 그리스정교 20%, 가톨릭교 10% 등이다. 옛 미·소 냉전시 동유럽 공산국가 중 가장 후진적이고 폐쇄적인 경제체제를 영위하였고, 1976년에는 자본주의 체제로부터의 차관이나 합작회사 설정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1년 공산화에서 탈피하여 생산수단의 완전 국유화와 철저한 통제경제, 그리고 1947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식 경제개발계획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되고 있으나, 아직 저개발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중해성 기후이므로 온화하고 다습한 편이나 일부 내륙지방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온이 낮다. 농업 및 광업이 주요 생산 부문이고, 서구식의 공업화는 아직 초기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석유·갈탄·철광·크롬·니켈·구리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최근에 수력발전과 함께 광산개발이 급진전되고 있다.

[ 역 사 ]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알바니아인들은 발칸반도 서부에 거주하였으나, 독립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14세기 후반까지 주변 강대국인 로마·비잔틴·슬라브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그 뒤 19세기 말까지 터키의 통치하에 있었다. 1912년 발칸전쟁에서 터키가 패하자 알바니아는 독립을 선언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자 이에 항거하였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호자(Hoxha)의 영도 아래 1944년 11월 29일 독일로부터 독립하였고, 1946년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소련(지금의 러시아)과 결별하여 독자노선을 걷자, 알바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팽창을 두려워하여 소련의 대유고 공세에 가담하였다. 1951년 스탈린식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하는 등 친소노선으로 전환하였고, 1955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완전히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스탈린(Stalin,I.)이 죽은 뒤에 흐루시초프(Khrushchyov, N.)의 반스탈린 노선 강요와 경제 간섭, 유고슬라비아와의 화해 등으로 1961년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소련과 대립 중이던 중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1968년에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여 일방적으로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탈퇴함으로써 동구권에서는 유일하게 친중국 세력이 되었다. 한편, 호자는 알바니아노동당을 창건한 이래 이와 같은 대외정책 노선이 변경될 때마다 국내의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폐쇄적인 일인독재 장기집권체제를 약 40년 동안 유지하다가 1985년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권력구조가 개편되었으나, 스탈린식 강압정치와 경제침체 등의 유산이 쉽게 청산되지 않았다. 1970년대 중국이 미국에 접근하자 이를 기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하여 중국과의 관계조차 냉각되는 등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하면서,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참가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 유혈 민중 봉기에 의해 차우세스쿠 정권이 몰락하자 알바니아는 알리아(Alia, R.) 노동당(19991년 6월 ‘사회당’으로 당명 변경) 제1서기의 주도하에 ‘위로부터의 부분적·점진적 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3월 카바야에서 최초로 반(反)공산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였다. 1991년 4월 26일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로 신헌법을 제정하고, 국호도 ‘알바니아인민사회주의공화국’에서 ‘알바니아공화국’으로 변경하였으며, 신(新)국회 간접선거에 의해 알리아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2년 3월 급진 개혁 세력인 민주당이 두 번째 자유 총선에서 승리한 이루 개혁·개방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1992년 4월 카리스마적인 민주당 당수 살리 베리샤(Sali Berisha)가 임기 5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국내 질서 회복과 경제 난국 타파를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우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또한 알바니아 특유의 종교적(이슬람교) 영향으로 알제리·이집트·리비아 등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진출은 활발히 하고 있다.

                                                                                                               티라너 Tirana

알바이나의 수도로 1614년 슐레이만 파샤가 이 지역에 인구집중을 위해 사원과 대중 목욕탕 등의 기반시설을 갖추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18세기에 티라나는 실크·면직물· 가죽·도자기·은그릇 등으로 유명한 교역도시로 발전하였다. 첫 발칸전쟁이 발생한 1912∼1913년에 일시적으로 세르비아 군대에 점령당하였으며, 1930∼1944년에 티라너 시민들은 나치스와 파시스트에 대항해 싸웠다. 오늘날 티라나는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산업은 도자기제조업·금속세공업·화장품·유리·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국립 박물관 [ National History Museum of Albania , Muzeu Historik Kombeumltar ]
1981년 세워진 알바니아 국립 역사 박물관은 알바니아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며 규모 면에서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이기도 하다. 특히 입구 벽면에 설치된 알바니아 민중들의 저항 모습을 담은 대형 모자이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전시물은 알바니아의 역사에 관한 유물들이다.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식민지 시절, 15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절,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지배를 받던 시절 등 알바니아의 오랜 역사에 관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스칸데르베그 광장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Tirana)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 깊은 광장이다. 15세기에 당시 알바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맞서 싸웠으며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영웅, 기에르기 카스트리오티 스칸데르베그(Gjergj Kastrioti Skanderbeg: 1405-1468)의 이름을 따랐다. 공산주의를 반영하여 설계되었으며, 아스팔트로 지어졌다.
에템베이 모스크 [ Et'hem Bey Mosque ]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 있는 이슬람교 사원 스켄데르베그 광장(Skenderbeg Square)의 시계탑 옆에 있다. 1789년 몰라 장관(Molla Bey)이 짓기 시작하였고, 아들인 에템 군사령관(Ethem Pasha)이 완성하였다. 알바니아가 공산국이던 시절 폐쇄되었으나 공산당이 몰락하기 직전인 1991년, 이슬람교도 만여 명이 모스크에 침입하여 집회를

다시 시작하였다.
페트렐러 성
알바니아 페트렐러에 있는 성.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Tirana)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페트렐(Petrelë)에 있는 성이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483-565) 시기에 처음 세워졌으나, 오늘날 남아있는 건축물은 1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평면 구조는 삼각형 모양이며, 두 개 탑이 있다. 크루저 성(Kalaja e Krujës; Krujë castle)과 방위 체제를 구성하여, 봉화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페트렐러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 자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마케도니아 MACEDONIA


․ 국명 : 마케도니아 전 유고슬라비아공화국 FYROM
․ 수도 : 스코프예 (Skopje)

․ 인구 : 2,034,000명

․ 면적 : 25,333㎢

․ 주요인종 : 마케도니아인(65%), 알바니아인(22%), 터키인(4%), 세르비아인(1.8%), 기타(5%)

. 주요언어 : 마케도니아어(Macedonian)

. 주요종교 : 마케도니아정교(70%), 이슬람교(29%)

․ 통화 : 데나르 (MKD 1) = 22원 (2021.12.)


[ 개 요 ]

현재 발칸반도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알고 있는 고대 마케도니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스 북부에도 마케도니아 지역이 있으며 이런 이유로 지명상의 논란이 끊이질 않아 결국 국명이 마케도니아 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YROM)으로 사용하고 있다.(표기상, 이하내용에서는 마케도니아라고 사용하겠다.마케도니아는 역사적으로는 거의 그리스, 로마, 불가리아, 세르비아에 걸쳐 지배를 받아오다가 역사와 1991년 국민투표에서 유고슬라비아로 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발칸의 화약고라고 불리워 지는 코소보에서 쏟아져 나오는 알바니아인들로 더욱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불가리아 계, 알바니아계, 그리스인들도 많은 편이며 언어는 슬라브어와 불가리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듯 다양한 민족들과 언어, 종교가 결합하여 마케도니아에서는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결합된 다양한 풍경들을 만나볼 수 있다. 분쟁이 많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을 그저 치안이 불안정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자연은 아름다우며, 다양한 중세수도원과 성당, 시장과 그리스, 터키 식 요리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 지리와 기후 ]

국토의 많은 부분이 높은 고원지대인데다가 대륙성 기후를 띄고 있긴 하지만 스코프예를 지나는 발다르강과 오흐리드, 프레스파 호스 등이 있으며, 에게 해와 아드리 해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온화한 편이다. 하지만 여름과 겨울의 특징은 확실하게 나타나서 여름은 굉장히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 문 화 ]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역사와 관련한 마케도니아 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발칸지역의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마케도니아인데, 불가리아와 알바니아, 그리스인 등이 함께 융화되어 있으면서 이들은 슬라브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코프예 Skopje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바르다르강(Vardar R.)상류에 위치해 있고, 중부유럽과 아테네 사이를 잇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로 마케도니아 인구의 25%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1963년 대지진으로 이러한 성장이 다소 주춤 되었으나 오늘날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근대도시로 성장해왔다. 특히, 금속처리, 화학, 목재, 직물, 가죽관련 산업이 발전했으며 이러한 산업의 발전으로 무역과 금융업이 동반 성장하였고 문화와 스포츠도 발전하였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이며, 도시명칭은 1912년 우스쿠브(Uskub)에서 스코플리에(Skoplie)로 변경되었고, 1950년대 이후 스코프예(Skopje)로 불리었다. 서기 395년부터 비잔티움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7세기 말에 슬라브족의 침입을 받았다가, 다시 비잔티움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4세기부터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많은 이슬람문화가 유입되면서 여러 사회문화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20세기 오스만투르크제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44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 통합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서 독립되면서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무스타파 파샤 모스크 [Mustafa Pasha Mosque]
스코프예 재래시장에 있는 모스크 셀림 1세(Selim I)가 오스만투르크 제국 제9대 술탄이었던 시절에, 당시 수상이었던 무스타파 파샤(Mustafa Pasha)가 지은 모스크(mosque)다. 스코프예 재래시장(Old Bazaar)에 있으며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건축물로 손꼽힌다. 지어진 후, 잘 보존되어 개축된 적이 없다. 모스크 옆 무덤에는 무스타파 파샤의 딸이 안치되어 있다


                                                                                                           오흐리드 ( Ohrid )    

마케도니아 남서부에 있는 도시.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오흐리드호(湖)의 북동쪽 연안에 있다. 9세기 후반에 불가리아 인에게 정복되어 슬라브인에 대한 선교(宣敎)의 거점이 되었다. 중기 이후의 비잔틴 미술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마케도니아 주요 휴양지의 하나이며, 고기잡이와 자동차부품·진주가공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10~11세기에 축성한 요새의 잔해가 남아 있으며, 성소피아 대성당(11세기)·성 클레멘스 성당(1295) 등 많은 성당이 있으나, 오스만 제국 통치시대(1398~1912)에 대부분 이슬람교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철도·고속도로·항공망을 통해 스코페와 연결된다.


고대 극장 [ Ancient Theatre of Ohrid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에 있는 그리스식 고대극장. 기원전 200년에 세워졌다. 마케도니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리스 시대의 극장이다.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오늘날 오흐리드 여름 축제(Ohrid Summer Festival) 등 여러 행사와 공연을 수용하고 주최한다. 극장 아랫부분만이 남아있어, 수용 인원을 파악하기 어렵다. 작은 언덕 두 개가 극장을 둘러싸고 바람을 막아줘서 음향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 [ St. Sophia Church ]
마케도니아 남서부에 있는 도시 오흐리드(Ohrid)의 대표적인 중세 건축물이다. 마케도니아의 대표적인 종교 건축

물로도 꼽힌다. 11세기(약 1035년-1056년)에 옛 바실리카 식 교회가 있던 터에 지금의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옛 교회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681년-1018)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 세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오흐리드의 종교 회의를 주관하는 교회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절 모스크(이슬람교 사원)로 쓰이면서 교회 내부 프레스코화가 석고로 가려졌는데, 덕분에 11~13세기 비잔틴 양식 프레스코를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교회와 프레스코를 복원하였다.
오흐리드 호 [ Ohrid L. , ─湖 ]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에 있는 호수. 오크리다(Ochrida)호라고도 한다. 면적 약 348km2. 해발고도 약 695m. 최대수심 약 285m. 호면은 남북으로 길며, 발칸 반도에서 가장 깊다. 호수는 연안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과 호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샘물로 가득 차나 투명도가 뛰어나게 높아 최대 20m에 달한다. 잉어 ·장어 ·송어 등이 잡히며, 어업은 부근 주민의 중요한 생업이다. 호수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호안의 여러 도시 사이를 기선이 왕래한다.
카네오 성요한교회 [ Saint John at Kaneo Church ]
오흐리드에 있는 마케도니아 정교회.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 (Lake Ohrid)가 내려다보이는 카네오(Kaneo)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 성 요한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문서나 고고학자의 설 등에 의하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 이전인 13세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비잔틴 양식의 건물이지만 아르메니아 교회 구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1964년 복원 작업 으로 되살아난 14세기 프레스코 성화는 물론, 20세기에 추가된 나무 성화 등 다양한 성화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