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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터키, 몰타

그리스 터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9-29 11:16
조회
716

                                                                                                       
                                                                                          그리스
GREECE

․수 도 : 아테네(Athens/4백만명)
․인 구 : 약 천100만명

․면 적 : 131,986㎢ (한반도의 3/5)

․주요도시 : 데살로니까, 파트라, 피레우스

․주요민족 : 희랍인(97%), 터키인 등 기타(3%)

․주요언어 : 그리스어

․종 교 : 그리스정교(Greek Orthodox : 98%), 이슬람교(1.3%)

․정 치 : 의회주의, UN, NATO, EU 가맹국

․언 어 :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통한다.

․통 화 : 1유로(EURO) = 약 1,390원 (2021. 12)


그리스는 남유럽 발칸 반도 남쪽 끝에 있는 나라이다. 역사적으로는 헬라 또는 헬라스(Hellas)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 음차 표기를 따라 한문으로 희랍(希臘)이라고도 일컫는다. 수도는 아테네이며, 주요 도시로는 테살로니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 요안니나, 카발라, 로도스, 세레스, 코린트 등이 있다. 남유럽의 발칸 반도를 바탕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 국가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불가리아와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터키와 접한다. 그리스 본토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지중해의 일부인 에게 해, 서쪽은 이오니아 해가 위치하며 1,400여 개에 달하는 섬과 바위가 흩어져 있다. 대표적으로 크레타, 로도스 섬, 산토리니 섬이 위치한 키클라데스 제도 등이 있으며 해안선 길이는 세계에서 11번째로 길다. 그리스는 냉전시기 공산주의 국가들과 인접하였고, 가상적국이던 터키의 영향으로 인하여 발칸 반도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편으로, 그리스군은 유럽에서도 강한 편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73년 그리스 군사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연평균 7%의 고속 성장을 이루어 그리스의 경제 기적이라 불린다. 그 뒤 성장세는 꺾였으나 경제 성장률은 남유럽에서 높은 편에 속했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도 1949년에는 프랑스의 40%밖에 되지 않았으나 2008년에는 98%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실제 국민의 소득은 크게 진보된 점이 없어 현재 최저 임금은 시간당 3.5유로로 프랑스의 8.9유로의 절반도 되지 않고 평균 소득도 절반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다.1인당 gdp는 만달러를 넘어서 17000달러 수준이다.

현대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비잔티움 제국 시대 그리스인들의 후손이다. 근대까지는 그리스인 대신 로마인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현재에도 그리스에서 로마인들이라 함은 자기 자신들을 가리킨다. 민주주의와 서양 철학, 올림픽, 서양 문학, 역사학, 정치학, 수많은 과학적ㆍ수학적 원리, 희극이나 비극 같은 서양 희곡 등 서양 문명의 발상지이다.

[지 리]

유럽의 남단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처럼 3면이 바다로 쌓인 그리스는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독특한 지리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스는 131,957 평방 km(50,949 평방 mile)에 2000개의 섬과 반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166개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육지와 섬 모두 산이 많다. 예전에는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었지만, 양과 선박건축으로 인해 많이 황폐화되었다. 삼림프로그램을 시도해 보았지만, 잦은 산불로 실패하고, 구름(nefos)과 아테네를 덮는 스모그 때문에 머리를 앓고 있다.

[기 후]

그리스는 따듯한 지중해성 기후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지만 북쪽과 해안지대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서 열기를 덜어준다. 아테네는 찌듯이 더워서 관광객들이 날씨에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반면 저녁은 시원해서 야외생활과 야간생활이 발달되어 있다. 겨울은 남쪽은 온화하지만 북쪽은 좀 더 춥니다. 11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이다.

                                                                                                                           
                                                                                                         아테네 ATHENS

* 아테네 평균 기온

구 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10.2

10.8

12.3

16.1

20.6

25.1

27.9

27.8

24.3

19.3

15.3

12.0

평균강수(㎜)

48.0

41.0

41.2

23.4

17.9

7.4

5.0

7.6

9.8

53.0

55.3

61.8



아고라 (AGORA)
일찍이 아테네 시민의 정치, 철학, 문화, 인생을 논하거나 상업 정보를 교환하던 광장, 1931년 부터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벌어져, 아타로스의 스토아가 복원되어 박물관이 되어 있고 여기서 발굴된 것이 진열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Acropolis)
아크로폴리스(도시국가)의 중심이었던 언덕으로 폴리스의 수호신을 제사 지내는 신들의 구역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에는 많은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이 나타났지만, 아크로 폴리스 중심에 있는 파르테논은 BC 438년에 완공된 도리아식의 거대한 신전으로 아테네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세워졌다.
올림픽 경기장 (Athens Olympic Stadium)
고대의 판 아테네 대 축제의 경기장이었던 곳이며,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알렉산더 출신의 대부호 아베로프가 사재를 털어서 재건했다. 국립정원 끝에 위치한 근대 올림픽 경기장으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행사 있을 때 통제됨)
제우스신전
104개가 있던 돌기둥 가운데 15개만 남아 있는 코린트 양식의 건축,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그리스 최대의 신전, 근처에 아드리아누스의 문이 있고 이 문 서쪽은 구 아테네, 동쪽은 신 아테네라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수천년간 웅장한 자태를 보여 주며 아테네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전쟁과 지혜의 신이며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건축물로 불리우며 도리스 양식의 건축물 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 신전은 규모 면에서 아크로폴리스 최대이며 한때 아테네가 폴리스 동맹국 사이에서 제국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시기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이용되기도 했다.
니케 신전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지나 처음 나타나는 불레 문을 통과하면 보이는 것이 승리의 여신인 "니케-우리에게는 영어식 발음인 "나이키"로 더 잘 알려진-의 신전(Temple of Athena Nike)"이다. 니케의 신전은 건축 양식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 처음으로 이오니아식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에 지어진 이 신전은 17세기 후반, 터키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리스 독립 후 다시 복원된 것이다.
신타그마 광장 ( : 헌법광장 Syntagma Square)
아테네의 중심이 되는 광장. 신타그마란 헌법이란 뜻이며 광장 앞에 옛 왕궁인 국회의사당이 있다. 카페가 광장을 둘러싸고 호텔이나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로 아테네의 얼굴이다.
무명용사 전사비 (Mnimio Aonostou Stratiotou)
국회 의사당 앞에 있으며, 독립 전쟁 이후에 있었던 여러 번의 전쟁에서 전사, 행방 불명 된 병사들의 비. 1923년의 작품으로 항상 2명의 위병이 여름에는 순백, 겨울에는 짙은 곤색의 중세 이래의 전통의상을 입고 서 있다.
리카비투스 언덕
이 언덕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아 아테네 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서울의 남산과 비슷하다 할 수 있으며, 저녁시간에는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붐빈다.
포세이돈 신전
포세이돈 신전은 기둥만 남아있는데 도리아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연대는 BC 5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된다. 포세이돈 신전은 10시에서 일몰 때까지 개방을 하며, 보통 여름은 20시 30분, 겨울은 18:30분 정도에 문을 닫는다.
에기나 섬(Aegina Island)
에기나 섬은 살로니크만에서 살라미스 섬 다음으로 피레우스 항구와 가까운 섬이다. 1일 크루즈로도 돌아볼 수 있는 섬으로, 섬의 북동쪽편에 고대 유적인 아페아 신전이 있다. 에기나 섬은 고대에 독립된 도시 국가로 한때 아테네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들 정도로 그 세력이 막강했다.
히오스 섬(Chios Island)
부근의 작은 섬들을 합쳐서 키오스주(州)를 이루며 주도(州都)는 키오스. 면적 831km2. 인구 약 5만(1990). 소(小)아시아 반도의 서쪽 끝, 카라부룸반도에 위치하며 두 지점 사이에는 8∼20km의 좁은 수도(水道)가 있다. 섬은 남북이 길고, 북부에는 1,200m의 산지가 솟아 있다. 남쪽은 평탄하여 과일 등이 생산된다. 델로스동맹(同盟)에 속해 있었으며, 시인 호메로스의 출생지라고도 한다.

                                                                                 
                                                                                                    고린도 [코린토스] Corinth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코린트 지협(地峽)에 있었던 고대 폴리스 및 현대도시.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 해(海)와 에게 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으며,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고린도書).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현재의 새 코린토스시는 구(舊)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5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 현(縣)의 주도(主都)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고린도 운하
그리스의 고린도 운하는 아테네 서쪽 약 87㎞에 위치한다. 1893년에 완공되어 총 길이 6.34㎞에 수심은 8m이며 폭이 25m로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이다. 칼로 깍아낸 것처럼 깨끗한 단면이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80m이고 다리의 폭이 25m이며 수심은 8m이다.사실상 영국 소유이고 공사는 프랑스가,그리스는 세금만 걷고 있다.
고린도 유적지
그리스의 고린도는 기원전 500년경 무역과 상업이 번창한 인구 30만의 대도시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44년에 재건되었으나 그 후 수차례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고린도 유적지에 있는 아폴로 신전은 기원전 6세기경에 건립되었으며 최고의 그리스 신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로마시대 수세식 화장실터,저수장, 시장 등의 유적이 있다. 50년에 사도 바울이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으며 통나무 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만난곳으로 알려졌다.

                                                                                                     
                                                                                                         올림피아 Olympia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쪽 그리스 엘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신역(神域). 크로노스의 언덕(123m)의 기슭에 있으며 예로부터 대지신(大地神)의 신탁소(神託所)로 알려졌다. 그 주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도기가 발견되었으나 신역의 역사는 초기 철기시대에 속하는 BC 1000년 전후로 소급된다. 당시 신역은 이웃의 피사가 엘리스와 함께 지배하고 있었으나 BC 570년 이후에는 스파르타와 연합한 엘리스가 올림피아의 종교적 감독자, 스파르타가 정치적 옹호자가 되었다. 출토된 종교적 봉헌물(奉獻物)도 BC 800년의 것이었다. 고전시대에는 제우스의 신역으로서 4년마다 개최되는 대제(大祭) 때의 경기(올림픽 경기)가 유명하였다. 신역은 헤라클레스가 만들었다고 하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속에는 제우스 신전을 비롯하여 제우스 제단, 헤라 신전, 펠롭스 신전 등이 있고, 북쪽에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서 헌납한 11개의 보물고(寶物庫)가 늘어서 있었다. 또한 경기 우승자의 기념상·봉헌상(奉獻像) 등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었다. 신역의 동쪽에는 경기장이 있고 서쪽에는 체육관·레슬링 장·숙박소 등의 여러 건축물이 있었다. 426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이교 신전에 대한 파괴령을 내렸기 때문에 신역의 파괴가 시작되었고, 다시 6세기에는 지진 또는 홍수가 일어나 철저히 파괴되었다. 1829년 프랑스인이 발굴을 시작하여 제우스 신전의 난간 조각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74∼81년에 독일인이 조직적인 발굴을 하여 프락시텔레스작(作)이라고 하는 헤르메스상(像)과 제우스 신전의 박공 등이 출토되었다. 1928∼43년과 최근에도 발굴이 계속된 결과 스타디움도 발굴되고, BC 457년의 금상아제(金象牙製) 제우스상과 그 상을 만든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작업장 및 사용한 도구 등도 출토되었다. 198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델피 [델포이] Delphoi

기원전 6세기 아폴로의 신탁을 들을 수 있는 델포이 신전(sanctuary of Delphi)은 그리스와 그 주변 국가들에게도 성소로 여겨졌던 곳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델포이를 ‘세상의 배꼽(navel of the world)’이라는 뜻의 옴팔로스(omphalos)라는 돌을 세웠다. 뛰어난 풍광과 조화를 이룬 성소인 델포이 유적은 진정한 종교의 중심지이자 고대 그리스 세계 통일적 상징이었다.파르나소스 산계(山系)의 파이도리아데스 산괴(山塊)가 형성하는 단애(斷崖) 중턱, 해발고도 500m 지점에 위치하며, 남쪽 프레이스토스 강(江)의 협곡에는 올리브의 수림(樹林)이 펼쳐진다. BC 8∼6세기 폴리스 성립기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神殿),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BC 5세기 민주주의의 전성기에는 신전의 보고(寶庫)가 아테네의 아테네 신전과 함께 상업 활동의 기금으로 큰 구실을 하였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BC 2000년대부터 지모신(地母神)의 성소(聖所)가 있었으나,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아폴로신으로 대치되었다. BC 7세기에는 신탁의 중요성이 커지자 중부 그리스 제국이 구성하는 인보동맹의 중심이 되었다. BC 6세기 초 제1차신성전쟁(神聖戰爭) 으로 델포이의 중립과 독립이 보장되어, 4년마다 제전적(祭典的)인 피디아 경기가 개최되었다.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포이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1892년 이후 프랑스 고고학회가 발굴을 시작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대량의 노예해방 비문(碑文)은 사회경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최근에는 5세기 때의 그리스도 교회 유적이 발견되었다.

                                                                                                     
                                                                                                            메테오라 Meteora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 메테오라는 거대한 바위군 정상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현재 남아 있는 6개의 수도원의 하나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메테오라(Meteora)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다. 이 일대에 있는 거대한 사암 바위 기둥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을 두고 지어진 이름이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이며, 가장 높은 것은 550m에 이른다. 메테오라는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 주의 바위 기둥들과 그 위에 세워진 수도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어 성지순례 코스에 들기도 하는 이곳은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거대한 바위 위에 만들어진 수도원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거에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11세기부터 이곳에 수도사들이 은둔을 시작했으며, 14세기 초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 이후 수도원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파손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었고 가장 규모가 큰 대(大)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그리고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포 유어 아이즈 온리에 나왔던 곳이다),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수사와 수녀들이 거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계단을 통해 수도원으로 올라가면, 좁은 터지만 수도자들에게 필요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 물탱크와 개인 기도실, 예배당은 물론, 휴게실, 도서관, 유골당까지 갖춘 곳도 있다. 내부에는 비잔틴 양식의 문화유적들이 많고 16세기에 제작된 프레스코화들이 있다. 성자들의 모습, 예수 탄생과 재림, 성모의 죽음, 가나의 혼인잔치, 사마리아 여자 등 다양한 내용의 프레스코화들은 보존 상태가 좋고 예술적인 가치가 높은 수작들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테살로니키 Thessaloniki

테살로니카(Thessalonica)라고도 한다. BC 315년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도로스가 건설하였고, 그의 왕비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시의 이름을 지었다. BC 146년 이후 로마 시대에는 속령(屬領) 마케도니아의 제일 큰 도시로 번영하였다. 양항(良港)인 동시에 바르다르 강과 모라바 강에 의해 도나우 강과 연결된다. 유럽 내륙의 출구에 해당하며 아드리아 해(海)와 비잔틴을 연결하는 에그나티아 가도(街道) 중간에 있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번영하였다. 1세기에 사도 바울로가 이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305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것을 기리기 위해 개선문을 건설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동로마 시대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다음 가는 도시로 번영하였고,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도 아테네 다음 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로 발전하고 있으며 아테네를 제외하고 그리스에서 대학교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갈레리우스 개선문 ([The Arch of Galerius)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 테살로니키에 있는 개선문. 298~299년 세워졌으며 로마군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적군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을 정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재위 305~311)가 303년에 헌정했다. 표면에는 승리를 기념하는 전투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다.
테살로니키 화이트 타워 (White Tower at Thessaloniki)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높이 30m 정도이다. 15세기에 베니치아 인이 세운 도성의 일부였으며, 18~19세기 터키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곳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져 '피로 물든 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탑의 표면을 하얗게 칠하면서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비잔틴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 광장
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주요 광장이다. 도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니키스 애비뉴에 있다. 1918년 프랑스의 건축가 에르네스 에브라르가 설계하였으나, 광장의 대부분은 1950년대에 지어졌다. 광장을 둘러싼 많은 건축물들은 개조되었으며, 북부는 주로 2,000년대에 복구되었다.

                                                                                                         
                                                                                                              카발라 Kavalla

에게 해(海)에 면하며 북부 그리스에서는 테살로니키(살로니카) 다음가는 항구도시이다. 로마시대에는 네아폴리스로 알려졌으며 타소스 섬의 식민에 의해 개발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오스만투르크 제국령이 되었으며 1813년 카발라 출신의 이집트 태수(太守) 메메트 알리가 영주가 되었다. 그 후 1912년 그리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담배 산업의 중심지이다.

                                                                                                     
                                                                                                           산토리니 SANTORINI

산토리니섬(그리스어: Σαντορίνη, Santorini), 공식적으로 티라(그리스어: Θήρα)는 그리스 에게 해 남부에 자리잡은 작고 둥근 모양의 화산 군도이며, 그리스 본토와는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키클라데스 제도의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73 제곱킬로미터이다. 200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3,670명이 거주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티라시아와 오이아로 구성되어 있다. 주변의 무인도인 네아 카메니, 팔라이아 카메니, 아스프로니시, 크리스티아나 섬(모두 티라 시에 속한다)을 포함한 섬의 총 면적은 90.623 제곱킬로미터이다. 산토리니는 원래 큰 섬 하나가 있다가 화산 폭발로 고대의 취락을 파괴하며 남은 잔해물로, 칼데라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 섬의 아름다운 절경과 밤의 유흥 덕분에 유럽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 곳이다.섬 가운데에 있는 약간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석호는 가로 세로 각각 약 12km와 6km이며, 주변 3면으로 300m 높이의 가파른 절벽이 둘러싸고 있다. 한쪽 면은 작은 섬 테라시아로 막혀있으며, 그리하여 석호는 북서쪽과 남서쪽으로 에게 해와 이어져 있다. 석호 가운데 수심은 약 400m라서 어떤 선박에건 안전한 포구가 된다. 섬의 항구는 모두 석호쪽으로 나 있으며, 바깥 해안에는 없다. 석호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중심 도시 피라(티라)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산토리니 섬은 물이 들어찬 칼데라이지만, 남 에게 해 화산대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활동의 중심지이다. 이 화산대는 폭은 20에서 40km이며 길이는 약 500km에 이른다. 이 지역은 3,4백만 여넌전부터 첫 화산 활동이 활발해졌으나, 테라의 화산 분출은 2백만여 년 전에 아크로티리 지역에서 일어났다. '산토리니'란 이름은 13세기 라틴 제국에서 붙인이름으로, 성 이레네를 뜻한다. 이전에는 칼리스테(Καλλίστη, Kallistē, '가장 아름다운'), 스트롱길레(Στρογγύλη, 둥근 것) 혹은 테라로 불렸다. 이 섬은 지구 역사상 거대한 화산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약 3,600년 전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에 미노아 화산 분출(혹은 테라 화산 분출)이 일어났다. 이 분출로 거대한 칼데라가 생기고, 주변에 수백 피트의 화산재가 쌓였으며, 이 사건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일어나 산토리니 남쪽 110km에 있는 크리티 섬의 미노아 문명이 몰락하는데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다른 흥미로운 가설로는 테라 화산 분출이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낳았다고 한다.


                                                                                                      터키 TURKEY

․수 도 : 앙카라(Ankara, 260만명)
․인 구 : 약 6천 200만명

․면 적 : 779,452㎢ (한반도의 3.5배)

․주요도시 : 이스탄불(Istanbul), 이즈밀(Izmir), 콘야(Konya)

․주요민족 : 터어키(Turkish, 90%), 쿠르드(Kurd) 및 아랍(Arab, 10%)

․주요언어 : 터어키(Turkish, 90%), 쿠르드어(Kurdish) 및 아랍어(Arabic, 10%)

․종 교 : 회교 (Moslem, 98%), 헌법상 정교분리

․통 화 : YTL (에틸레)


4개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동서문화의 십자로에 위치해 있다. 4개의 대제국의 중심이 건설된 곳은 힛타이트, 로마, 비잔틴, 오스만의 대제국이 번성했던 곳이다.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아타튜르크의 지도 아래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실현한 공화국이다.
다양성과 역사적인 측면의 깊이에서도 터키에 인접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여러 문화적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유산 외에도 아크아마린의 물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비치, 울창한 숲과 높은 산들, 어드벤처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는 리조트라이프 등 풍요로운 자연과 다양한 관광자원으로 가득한 나라이다.



[지 리]


총면적은 780,000㎢ 에게해, 지중해, 마르마라해, 흑해에 접해 있으며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북위 36도와 42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지역인 트라케로 나뉘어 진다. 동쪽으로는 이란, 아르메니아, 남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지중해, 서족으로는 그리스, 불가리아 북쪽으로는 흑해와 접해있다.

[기 후]

지중해 연안지방의 전형적인 온난성 기후, 흑해연안부의 따뜻한 기후, 고산들로 가득한 산악지대에서는 연중을 통하여 새하얀 설경을 즐길 수 있다.

[사회문화]

인구는 약 6,200만명이고 사용언어 터키어이다. 터키는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000년에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기록에는 터키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이며,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키의 테오만 야부그 왕국을 흉노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터키 국민들은 그들의 조상이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해왔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16개 군주국이 흥망을 거듭하였으며 터키인들이 아나토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기 10세기경이라고 한다. 터키인들은 중세기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회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터키 국민들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는데 상당부분은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례로 터키어는 우리나라 말과 같이 우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데 문장 구성순서, 모음조화, 어미 활용 등에 있어서 우리나라 말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다.

                                                                                                              이스탄불 Istanbul

이스탄불 평균기온


구 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5.6

5.7

7.0

11.4

16.0

20.7

23.3

23.4

20.0

15.6

11.6

8.2

평균강수(㎜)

93

71

58

43

30

22

17

15

27

53

88

101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멧트 모스크 SULTAN AHMET MASQUE)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바탕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는 것에서 블루 모스크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를 넘는 조그만 창에는 스탠드 글래스가 장식되어 있으며, 스탠드글래스의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터어키 최대의 모스크로 오스만 터키시대에 건설되었다. 돔은 직경 27. 5m, 높이 43m 나 된다.
지하 저수저(Yerebatan Sarayi)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지하 저수지는 532년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 황제 때 완공되었다. 도심민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곳에서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끌어온 물을 이곳에 저장했다. 길이 140m, 폭이 71m, 높이 9m로 된 이 지하 저수지는 336개의 기둥으로 건축되었고, 8만톤의 저수량을 갖고 있다. 이곳의 기둥들은 고대 그리스 신전들에서 운반되어 온 것들도 있고 그중에는 메두사의 두상도 주춧돌로 사용되었다.
성 소피아 사원(AYA SOPHIA CAMII)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대성당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 교의 특징인 뛰어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와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미나레트 등이 동거하는 기묘한 세계를 연출한다. 크리스트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에 창건했던 것을 6세기 전반에 코슈니아누스대제가 다시 크게 개축하였다. 비잔틴 건축의 가장 오래된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15세기에 미사원은 개조되어 터어키 공화국 때부터 박물관으로 공개 되었다.
톱카프궁전 (TOPKAPI PALACE)
보스포러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대대로 술탄 군왕들이 거처했던 성. 옛날 요리를 만들었던 곳은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이 되었고 보물고에는 술탄 군왕들이 사용했던 옥좌, 면류관, 무기, 생활용구, 왕비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전시되어있고 터키 각지에서 미녀를 모집했던 할무, 신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남자)의 방도 있어 흥미진진하다.
그랜드 바쟈르(GRAND BAZAR)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 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히포드럼(마차경기장 HIPPODROME)
본래 이곳은 투사들이 목숨을 내건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비잔틴 황제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수많은 전쟁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곳이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가 전시되어 있다.
모자이크 박물관 (Great palace mosaic museum)
블루모스크 사원 뒤에 있는 ‘아라스타’ (술탄 마흐멧 1세 건립)라는 시장에 있다. 1935년 ~ 1938년, 앙카라 대학과, 소코틀랜드의 성 앤드류대학의 고고학자들은 술탄 아흐멧 광장의 아라스타 시장에 대한 발굴작업을 통해 모자이크가 깔린 대궁전의 정원을 발굴했다. 이어 1951~1954년 2차 발굴작업에서도 초기 비잔틴시대 (AD 500년경) 모자이크가 발굴되자, 이를 보전이 결정되었고, 아라스타 시장에 있는 상점 16개를 철거 및 보수하여 현재의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S)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가 약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탁심 광장
신시가지의 탁심 광장 로터리 중앙에는 독립 전쟁의 기념비가 있다. 주변에는 고급 호텔과 쇼핑 거리가 대부분을 차지해서 이스탄불 최고의 하이라이트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탁심 광장에서부터 윈도우 쇼핑을 즐기며 이스티크랄 거리를 거닐면 터키에서 가장 멋진 백화점이나 바자르를 볼 수 있다.

                                                                                                           
                                                                                                           앙카라 (Ankara)

중앙 아나톨리아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술탄제를 폐지하고 터키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는 전까지 터키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제치고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다. 앙카라의 주위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히타이트(Hatti)문명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B.C 2000년경 앙카라의 주인은 히타이트인들이었다. 그 뒤로 이 곳은 프리지아인(Phrygian)과 리디아인(Lydian) 그리고 페르시아인(Persian)들로 차례로 주인을 바꾸어 갔다. 그러다 B.C 3세기에 와서 갈라디아 사람들이(Galatian) 이 곳을 그들의 수도로 정한다.

아타튀르크의 묘(ANITKABIR)
신시가 서쪽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곳은 터키 공화국이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의 장사를 지내기 위해 1944년부터 10년에 걸쳐 세운 것이다. 대리석을 깔아서 만든 가운데 길을 지나면 우측에는 위패를 모셔놓은 넓은 곳이 있고, 좌측에는 큰 기둥으로 세워진 안타투르크의 묘가 나타난다. 천정은 모자이크로 깨끗하게 장식되어 있고 건물의 외벽에는 그가 한 연설의 일부가 새겨져 있으며, 위를 둘러싼 앞 공간에는 그가 아끼고 사랑하던 차와 같은 소장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언덕에서는 앙카라 시가 한눈에 보인다.

                                                                                                     
                                                                                                       갑파도키아 (Cappadocia)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카파도키아.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갖이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는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양파모양의 사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카파도키아의 참 매력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원뿔을 엎어 놓은 듯한 용암층 바위 속에 이 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년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 m) 등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곳의 지형은 오랜 세월을 걸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깎이는 습성을 지닌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바위를 깎아 만든 이들의 거주 공간은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데린구유라고 불리는 지하도시와 마찬가지로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러한 응회암 집의 입구는 지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갑파도키아의 중심도시, 괴레메(Goreme)
이 곳은 데린구유 지하도시와는 달리 지상으로 나있는 바위 동굴 속에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이 곳의 교회들 대부분은 건축시기가 9세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의 벽면은 온통 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이 그려진 성화로 장식되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들 성화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괴레메, 우치사르 마을 골짜기에는 험한 절벽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여기저기 석굴 거주기가 남아 있었고, 이러한 석굴 주거지를 그대로 보존해 놓은 것이 괴레메 야외 박물관으로 마을 외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괴위치하고 있다.
젤베 야외박물관 (Zelve Open Air Museum)
무수히 많은 동굴 주거지가 있다. 이슬람의 박해를 벗어나기 위하여 기독교도들이 은둔하면서 살았던 곳으로, 지금까지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굴 주거지는 내부가 가느다란 터널로 연결되고 2층이나 3층으로 되어 있으며 저장창고 따위의 다양한 시설물이 있다. 1950년대까지 실제로 동굴들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나 동굴의 붕괴 위험이 높아져 근처로 이주한 후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젤베(Zelve) 계곡
젤베계곡은 괴뢰메에서 10KM 떨어져 있는 폭이 좁고 깊은 골짜기이다. 이곳은 집, 방앗간, 교회 등 도시가 갖추고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완비하고 있다. 이는 1950년까지 사람들이 살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곳은 붕괴의 위험이 있어 1950년에 거주주민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현재 지진과 비, 바람에 많이 파괴되어 있지만 암굴도시의 장엄한 모습은 많이 남아있다.
비둘기 계곡 우치사르(Uchisar)
괴레메 동굴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산으로 우치사르(Uchisar) 성채가 위치하고 있다. 과거 온통 응회암으로 뒤덮여 있었던 이곳에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터널을 만들어 살았으나 부식작용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벌집모양의 바위산이 만들어졌다. 130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기괴한 모습의 바위들의 생성 원인은 이 지역이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바위들에 수없이 뚫려 있는 구멍들을 볼 수 있다. 이 구멍들은 비둘기 집이다. 이 집들의 주인이었던 비둘기들은 이곳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에겐 귀한 손님이었다. 성화를 그리기 위한 재료인 알을 주기 때문이다.
지하도시 데린구유
버섯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최대 3만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 도시이다. 이곳의 형성시기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히타이트 시대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본격적인 확장기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 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오늘날 일반인에게는 소수만이 공개되고 있다.

                                                                                                           
                                                                                                                  콘야 (Konya)

성서상의 이고니온이라 불렸던 콘야는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520,000명의 주민이 사는 터키 중요도시 중 하나이다.지중해로부터 250KM 흑해로부터는 500KM,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진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가 1000M에 달해 콘야는 고원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콘야의 경제적인 기초는 카펫과 가죽의 생산이다. 그 외에는 광물 산업정도가 있다. 콘야는 11세가 셀주크터키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콘야로 몰려들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많은 역사적인 경관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메블라나 박물관과 마나레 신학교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콘야는 몇 년 전만해도 보수적인 메블라나교의 영향력으로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프를 써야 했다. 하지만 2002년 현재에는 스카프를 쓰지 않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활보 할 정도로 개방되어 있다.

터키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지 메블라나 박물관(Mevlana Museum)
메블라나교단은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메블라나 루우미(Mevelana Jelaleddin Alromi: 1207-1273)가 13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수피교단의 한 교파이다. 지금도 푸른 원추형의 탑이 아름다운 메블라나 박물관은 메블라나 루우미가 교파를 세운 이래 1923년까지 메블라나교에서 성당과 사원등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1923년 터키에서 반종교정책이 채택되어 왕정의 절대지지 세력이었던 메블레냐 교단은 철퇴를 맞게 되어 교단은 헤체되고 메블라나 사원은 폐쇄되었다.
알라딘사원
셀죽투르크 시대에 지어진 알라딘 사원.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불루모스크보다 400년 전에 지어졌다.

                                                                                                         
                                                                                                        차탈휘위크 [Catalhuyuk]

터키 중남부 코니아 근처에 있는 중동 지방의 주요 신석기 유적지.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가 1961~65년에 걸쳐 발굴한 결과 이곳을 포함하는 아나톨리아 지방이 신석기 시대 선진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BC 6700년경, 그리고 가장 후기의 건축물은 BC 56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진흙 벽돌로 지은 직사각형의 집에서 살았는데, 지붕에서 나무 사다리를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집 안에는 벽난로와 화덕이 있고, 바닥보다 조금 높은 단은 잠을 잘 때 또는 앉거나 일할 때 사용되었다. 식용 곡물과 유료종자·견과류를 널리 재배했으며, 가축을 길렀던 흔적도 남아 있다. 종교 구역에서는 놀랄 만큼 뛰어난 벽화가 그려진 신전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신전들은 상부 구석기시대의 예술과 관련을 갖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파묵깔레 (Pamukkale)

파묵깔레는 석회층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그중에서도 파묵깔레의 석회층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로, 대지 상부에서 흘러 내려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쌓여져서 현재의 광활하고 희귀한 경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딱딱해진 광활한 석회층의 패인 곳에 상부쪽에서 흘러내려온 온천수가 담겨 야외 온천을 만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파묵깔레 석회층은 그 광활함에서 놀라고, 크림색의 종유석과 같은 신기한 모습도 발견된다. 멀리서 파묵깔레 석회층을 바라보면 목면을 뭉쳐놓은 듯 보인다. '파묵깔레'라는 지명이 터키어로 '목면의 성'의 뜻을 가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에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처음 세워져 로마 시대의 온천지로서 2,3세기에 가장 번영했던 고대 도시다.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노천 온천(HOT SPRING & SPAS)
파묵깔레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파묵깔레의 노천온천은 수천년 동안 깊은 지하수에서 미네랄워터를 쏟아내었다. 이 지하 온천수들이 쏟아져 나와 거대한 원형의 욕탕을 형성하였고, 희고 풍부한 미네랄 내용물들이 석회질 바위와 융화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이곳은 예로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으며, 근처에 순례객들을 위해 히에라폴리스가 세워졌다. 이 온천에 기적을 바라는 순례객들은 아픈 몸을 담그고 치료를 받곤 하였다. 파묵깔레의 온천은 초당 400리터의 물을 쏟아내고 있고, 이곳에는 하루 6000명의 관광객이 수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온천수를 가지고 있다.

                                                                                                                         
                                                                                                            에페소 (Efesus)

에페소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Androklos)의 지휘하에 그리스의 이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현인들에게 그들의 새도시가 어디에 세워질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현인들이 예언하기를 야생 멧돼지 한마리와 물고기 한마리가 그들을 새도시로 이끌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야외에서 안드로클로스가 생선을 굽다 그 중 한마리가 팬에서 미끄러져 가까운 숲속으로 떨어졌고 이와 함께 튄 불똥이 숲에 번지자 사나운 멧돼지 한마리가 불을 피해 뛰쳐나왔다.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한 안드로클로스는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 죽이고 바로 그 자리, 즉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서쪽으로 1200미터 떨어진 고대 에페소가 있던 곳에 그들의 새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7세기, 에페소는 키메르(Cimmerian)인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을 포함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이곳은 그리스의 참주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기원전 6세기경 에페소는 리디아왕국의 군주 크로이소스(Croesus)의 지배를 잠시 받긴 하였으나 곧 페르시아에 정복되었고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던 알렉산더 대왕은 크로이소스에 의해 재건된 아르테미스 신전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곳을 정복, 에페소는 평온을 되찾고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리시마쿠스(Lysimachos)는 피온산(Mt.Pion)과 코레쏘스산(Mt.Koressos) 중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높이 10미터, 총 길이 9Km의 성벽으로 요새화시켰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형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등의 유적은 이 당시 지어진 것이다.

원형극장(Efes Theatre)
2만 5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이 야외 원형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기 1-2세기경의 유적이다. 로마식 극장으로 재건된 것은 클라우디우스(34-41 AD) 시대를 첫 시작으로 하였고 이후 극장의 , 3층이 네로 황제(54-68 AD)와 셉티무스 세베루스(193-211 AD) 시대에 지어졌다. 3단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이곳의 실내 정면은 각종 부조와 원주, 창으로 장식되어 있고 최상위 단인 3층 윗부분에는 다양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신전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도미티안 신전 이후 두번째로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A.D 138년에 지어진 이 신전은 에페소스 시민들에 의해 지어져 로마의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AD 117~138년 사이에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오현제 중 하나로 추앙 받는 현황 이였다. 선황의 조카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해 즉위한 황제였다. 속주들의 안보와 육성에 힘썼으며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 행정, 관료, 군사 제도 등 제국의 기초가 되는 제도들을 다듬고 혁신했으며 학문과 예술 등의 학술적인 면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또한 선황처럼 양자를 들여 자신의 양자이자 후에 황제가 되는 안토니누스피우스 황제에 의해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사도요한의 교회(Church of St.John)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이곳은 기원후 37년-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요한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고 또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 위에 서기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77-565 AD)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신비한 사연을 가진 성모 마리아의 집
에베소 3차 종교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예수가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의 남은여생을 위해 산위에 작은 집(메르예마나 에비)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집은 후에 찾는 이가 없어 잊혀졌다.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에 따르면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이곳 터키 에페소로 피신해 와서 숨어 살았으며 당시 거처는 에페소 인근의 불불산 남쪽 기슭이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곳 불불산 남쪽 기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현재 에페소에 가면 실제 뷰불다(크레소스 산)를 구불구불 오르는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임종을 거둔 기억자형의 토담집이 있다. 베일속에 가려진 채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임종 장소는 세상사람들에게 알져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독일 베스트팔렌주의 돌멘이라는 시골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수녀 캐더린 에메리히(Emmerich)가 1878년 환상(Vision)을 보게 되는데 그 환상에 예수 승천 후의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의 에페소에서의 생애가 생생하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점은 에메리히 수녀는 12년이나 병상에서 보낸 사람이었으며 에페소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1891년 5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발견된 곳이 바로 지금의 장소이며 후에 교황 요한 23세가 1961년 이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1967년 교황 바오르 6세와 1979년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함으로써 성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쿠샤다시 (Kusadasi)

쿠샤다시는 아이든(Aydin)시의 해안선에 있는 작은 항구의 이름이다. 쿠샤다시항이 있는 아이든 시는 예전부터 질좋은 무화과 산지로 유명했다. 고대에는 트랄레이스로 알려졌었으며 유명한 조각학교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 때의 유적이다. 1186년 이후 도시는 셀주크왕조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 곳의 박물관에는 각 시대의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다. 에게해의 휴양지로 유명한 쿠샤다시는 가면새의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빛나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쿠샤다시 인근의 디딤에 있는 아폴로 신전(Temple of Apollo)
쿠샤다시와 같이 아이든 지방에 속하는 디딤은 먼데르라 불리우는멘데레스강(Menderes River)계곡 유역에 있다. 디딤(디디마)은 오로지 하나의 유적밖에 없지만 그 가치는 매우 뛰어나다. 이 하나뿐인 유적인 아폴로 신전은 이 지역 고대 유산 중에서 가장 신성한 신전으로 여기지고 있다. 디딤은 도시가 아닌 밀레투스에 속한

성지였다. 즉 신전과 신전을 지키는 성직자들이 살았던 곳이었던 것이다. 이런 디딤은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에 알렉산더대왕이 이 곳을 정복하여 페르시아에 디딤을 바친 성직자들의 마을을 파괴 하고 아폴론 신전을 새로이 정비하였다.

                                                                                                             
                                                                                                             쉬린제 (Sirince)

이즈미르(Izmir) 주(州) 셀추크(Selcuk)시에서 동쪽으로 8km 거리에 있는 그리스인 마을이다. 조용하고 한적한마을로 마치 우리나라 1970년대의 농촌마을과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는 곳이며, 와인과 수공예품으로 유명한 터키 셀축 인근의 쉬렌제 마을은 전통 목조 가옥들이 오밀조밀 들어선 작은 마을이다.

에페소스(Ephesos)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이 15세기 무렵에 이주해와 형성한 마을이다. 본래 지명은 그리스어로 ‘못생긴’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체르킨제(Cirkince)였으나 1926년에 이즈미르 주정부에서 터키어로 ‘즐거움’을 의미하는 현재의 지명으로 바꾸었다. 현재 주민은 약 600명이며, 대부분이 그리스계 이다. 산비탈을 따라 조성된 마을의 모든 건물이 흰 회벽에 붉은 기와 지붕을 하고 있으며, 그리스풍으로 꾸며져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이들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 요식업 등이 발전해 있다. 이 마을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람들이 몰리는 주요 관광지만 둘러보는 대부분의 터키 여행자들에게 산간에 살고 있는 평범한 터키 주민들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쉬린제 마을의 가옥들은 이곳이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살던 곳인지라 아직도 그리스 양식의 가옥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특산물로는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올리브 제품, 포도, 사과, 복숭아를 이용한 과실주, 수공예 레이스 등이다.


                                                                                                             
                                                                                                               안탈랴 Antalya

안딸랴(Antalya)의 옛날 이름인 Attaleia는 B.C.150년에 팜필리아 해안에 도시를 세운 페르가멘의 왕 Attalos 2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과거의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안딸랴 지방은 터키에서도 경치좋기로 유명한 곳으로 고고학적이고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안딸랴는 바다, 태양, 역사,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해안을 볼 수 있다. 터키 남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터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자연미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지금도 신과 여신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신비로운 도시이다.

아스펜도스(Aspendos)
안탈랴에서 50km 떨어진 옛 그리스-로마 시대의 도시로 로마시대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이 유적이 유명하다. 아스펜도스 극장은 로마식 원형극장으로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며, 터키에서는 현재까지 가장 잘 보존된 고대극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원형극장은 최대한의 음향효과를 내기 위해, 석회암과 대리석, 붉은 사암을 적절히 사용하여 만들어 냈으며, 무대위에서 동전을 떨어트리면 객석에 골고루 확성 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극장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를 기리기 위한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
BC 2세기에 세운 장식용의 대리석 아치로 130년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도시를 통치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고대 팜필리아 지방에서 가장 볼만한 명소이다.
카라알리올루 공원(Karaalioglu Park)
카라알리올루 공원은 화려한 색상의 꽃들과 지중해와 산이 절묘하게 어울어진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안딸랴 최고의 공원이다. 이 공원에 가면 B.C 2세기에 지어진 높이 5.5m의 히드르륵 Hidirlik 요새를 볼 수 있다.
이울리 미나레(Yivli Minare)
B.C 2세기에 페르가문의 안탈로스 2세에 의해 도시의 이름이 안딸랴로 정해진 이 도시는 페르가문의 치세 이후에오트만 대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비잔틴과 셀주크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이 이울리 탑은 13세기 셀주크투르크의 술탄 이있던 Alaeddin Keykubat에 의해 세워졌다. 이 탑은 회교사원의 일부분이었지만 현재 회교사원의 다른 것들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이 이울리 탑만이 38M의 높이를 자랑하며 건재하고 있다. 이 탑은 많은 낡았지만 푸른 타일로 만든 탑 정면이 매우 아름다워 도시의 상징물처럼 되었다.

                                                                                                                           
                                                                                                              트로이 Troy

터키 서쪽에 있는 고대도시의 유적.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리오스’라고 불렸다.  스카만드로스 강과 시모이스 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렀다)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을 발굴하면서 유적이 밝혀졌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미술관에 소장 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 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샤프란볼루 Safranbolu

흑해로부터 65km 떨어진 아나톨리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샤프란볼루는 오토만의 건축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터키 최고의 여행지이다. 이 지역에서 자라나는 샤프란 꽃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 도시의 고대문명은 BC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때는 카스트모누-게레데-이스탄불을 잇는 유명한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이자 오토만 제국의 인기 있는 거주지이기도 했다. 계단식으로 경사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샤프란볼루의 이 오래된 가옥들은 모두 오토만 제국의 가옥과 주택들로 백도제를 바른 벽과 붉은 타일의 지붕에 목조의 절반은 박공으로 되어 있다. 이 매혹적인 가옥들은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샤프란볼루 특유의 이 가옥들은 전통적인 터키의 건축술로 세워진 것으로, 수백 년에 걸쳐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이 지역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이다. 전통가옥들은 암반의 돌을 채취해 지었고, 목재는 대부분 전나무와 소나무로 지어졌다. 아름답게 조각된 나무들을 인테리어로 사용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정원과 실내는 높은 벽으로 밖과 차단되어 다른 남자가 여자를 볼 수 없도록 설계하였고, 집안에서도 남, 녀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곳 중심부에는 약 2,000여 채의 터키 전통가옥이 있으며, 모두 18세기에서 19세기, 그리고 20세기가 시작되는 무렵에 세워졌다. 이 중 800채의 가옥이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카이마카밀라 하우스 House of Kaymakamlar
18~19세기에 세워진 샤프란볼루 전통 가옥들의 역사와 문화, 삶, 양식, 건축기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박물관이다. 이 집은 18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원래 소유자는 하시 마흐멧 에펜디(Hacy Mehmet Efendi)로 샤프란볼루 가옥을 건축하던 감독관이다. 가옥이나 소유물의 대부분은 다행히도 아주 잘 보존되어 있으며, 1979년에는 터키 관광부의 샤프란볼루 보호정책의 일환으로 국영화되면서 새롭게 복원되었다. 이 집은 샤프란볼루 시장 주변의 하이딜릭크(Hydyrlyk)의 경사진 거리에 있으며 1981년 12월 16일부터 교육센터로 일반에게 개방되고 있다.
뭄타즐라 저택 Mansion of Mumtazlar
이 저택은 법률학자이자 이슬람 신학학교 수석 교수인 질라 에펜디에 의해 1888년에 세워졌다. 그의 부인은 루멜리아의 군사법원 재판장인 아지즈 베이의 딸이었는데 직접 저택을 설계하였다. 공사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집은 5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 저택은 오토만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라우즈밀러 하우스 House of Karauzumler
하시 할리(Hacy Halil) 지구에 있는 집으로, 19세기말에 세워진 집이다. 이 집은 목조로 된 틀과 직사각형의건축형태, 그리고 거리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곁방의 생활공간인 홀(sofa)과 안방의 3개의 창문 등으로 볼만한 가치가 있다.
카이레칠레 하우스 House of Kileciler
무샬라에 있는 아퀴피나르(Akpynar) 거리에 있으며 1884년 하시 에펜디에 의해 세워졌다. 1층은 각종 혼합된 목조 틀로 가득 차 있고 2층의 전면은 돌로 우아하게 설계되었다. 집은 하렘(여성들의 집)과 세라믈릭(남성들 전용 방), 두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렘과 세라믈릭은 서로 들어가는 출구가 다르며 여성들의 집은 사생활 보장을 위해 높은 벽으로 차단되어 있다.

                                                                                                               
                                                                                                              케코바 Kekova

파묵칼레에서 차로 약 4시간 떨어진 곳에 기원전 2세기경 비잔틴 문명을 꽃피웠던 수중도시 케코바가 있다. 케코바는 한때 번성한 문명도시였지만 지진으로 인해 바닷속으로 잠겨버렸다. 유람선을 타고 섬 근처로 가면 바닷속에 가라앉은 항아리와 섬으로 이어지는 계단, 목욕탕 등 그 시대의 흔적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간혹 수면 아래에 십자가가 보이는데 바로 당시의 묘지 흔적이다.

                                                                                                                   
                                                                                                              시데 Side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시대부터 비잔티 시대까지 오랫동안 번영한 도시국가로 이곳은 한때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된 적이 있었던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1947~66년 만셀(A.M. Mansel)에 의해 발굴되었고, 고대도시의 자료로서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B.C. 2세기에 건축 된 시의 벽 중에는 세계의 열주 도로가 있고 시 중심에는 아고라(2세기), 극장(2세기), 욕장(5세기, 현재는 박물관이 되어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다) 등이 있다.

                                                                                           
                                                                                         몰타 Malta

․ 국가 명 : 몰타공화국 [Republic of Malta]
․ 위 치 : 유럽 남부 지중해상

․ 인 구 : 40만 3532명(2008년 현재)

․ 면 적 : 316㎢

․ 수 도 : 발레타 [Valletta]

․ 언 어 : 몰타어, 영어, 이탈리아어

․ 종 교 : 카톨릭

․ 통 화 : 유로(Euro 1) = 약 1,390 원 (2021. 11.기준)


[개 요]

정식 명칭은 몰타공화국(Republic of Malta)으로, 영연방의 하나이다. 이탈리아반도 남방 시칠리섬 남쪽에 있는 도서국가로, 몰타·고조(Gozo)·코미노(Comino) 등 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196.8㎞이다. 종족구성은 아랍혼혈인·시실리아인·스페인인·이탈리아인·영국인 등이다. 공용어는 몰타어와 영어이나 이탈리아어도 통용된다. 국민의 98%가 가톨릭교를 믿는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며, 좁은 국토에 산과 돌이 많고 부존자원이 적은 관계로 농업과 공업이 발달할 수가 없어 주로 관광·중계무역에 의존하고 있다. 이 지역은 로마·버질턴·아랍·터키 등 인접국가의 지배하에 있다가 1814년 영국에 합병되었다. 1947년 처음으로 자치가 허용되었으나 국내 분쟁과 소요로 중단되었다가 1961년 다시 자치가 실시되었다. 1958년 반영폭동(反英暴動)이 일어났고, 1964년 국민투표를 통하여 같은 해 9월 21일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1964년 영국과 체결한 몰타 내 영국군사기지사용 협정을 폐기하고 1979년 3월 영국군을 전부 철수시켰다. 이후 영국 등 서방권과의 관계가 소원해짐에 따라 당초의 비동맹노선을 이탈하여 소련·중국 및 북한 등 공산권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였으며, 1983년 6월 의회에서 카톨릭 교회의 부동산 8할을 몰수하는 법안을 가결시켜 로마교황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러나 1987년부터는 중도우경을 표방하며 친서방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독립 이후에는 입헌군주국으로 남아 있다가, 1974년 12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1987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1964년 유엔에 가입하고, 1971년 비동맹·사회주의노선을 추구하여 1973년 비동맹에 가입하였다.

[사 회]

몰타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 경영은 서구의 우수한 교육제도를 뿌리 내려 발전시키기 보다는 군사기지로서의 지원 기능에 치중하여 오히려 한때 초·중등교육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독립 후 여러 형태의 사회보장제도가 정착되어 몰타 주민은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고 의료제도도 잘 갖추어지게 되었다. 교육은 6~16세까지 의무교육이며 공립학교에서는 무상으로 교육한다. 이 때문에 재정적자가 개선되지 않고 대외채무가 188.8 백만 달러(2005년)에 이른다. 수도 발레타에 몰타대학교가 있다. 출판활동이 매우 활발하며 정치 성향의 정기간행물이 특히 많다. 작은 지중해 섬인 몰타는 고고학적 유물의 보고이다. 특히 선사시대의 무덤인 할-사플리에니 하이포게엄(Hal-Saflieni Hypogeum)은 BC 3600년 경 이룩된 법상치 않은 문명의 예술적 건축 증거로 유명하다. 하이포게엄과 몰타의 많은 신석기시대 사원들은 지중해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유산이며 인류 진화의 독특한 단면을 보여준다. 묘지들은 석기시대의 몰타 지역 주민들이 복잡한 문화와 다양한 믿음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이퍼게엄은 죽은 자 뿐 아니라 산 자를 위하여 사용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원으로 보인다. 하이포게엄과 사원들의 벽에는 소용돌이 문양의 그림과 여러 가지 상징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구석기 몰타인(人)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하여 상징을 사용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이포게엄, 사원들 이외에 몰타 군도의 3가지 유적 중 하나인 바로크풍의 수도 발레타(Valletta)는 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세계문화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타 마을 수호신을 기리는 불꽃놀이와 행렬이 특징인 축제를 중심으로 민속전통이 계승·발달하였다. 문학에서는 민족시인 둔 카름이 유명하다.

                                                                                                               발레타 Valletta

몰타의 수도이며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을 비롯한 군사 유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 긴 역사 동안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로마·비잔틴·아랍, 그리고 성 요한 기사단의 지배를 받았던 곳으로, 총면적 55㏊에 320여 개의 기념물이 남아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역사 지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심가는 스케베라스 산에 면한 킹스웨이이며, 시내에는 16세기의 대성당, 18세기의 왕립(王立)대학, 영주의 저택 등의 사적이 있다. 많은 권력자들이 다투어 지배하려 했으나, 1530년에 프랑스계 기사단(騎士團)의 지배하에 들어가 안정되었다. 도시이름은 1565년 9월 8일(국경일)에 투르크를 격퇴한 기사단의 우두머리 장 파리스 드 라 발레타에서 연유하였다. 1814년에 영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기지화(基地化)가 진척되었다. 1964년에 독립한 후에도 영국의 영향력이 강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역사적 건물이 이탈리아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남아 있는 옛 건물들과 온화한 기후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 든다

성 요한 대성당 [ St. John’s Co-Cathedral ]
카라바조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매우 장식적인 바로크 양식의 내부를 갖춘 대성당. 성지로 여행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11세기 후반에 설립된 종교 기사단인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의 교회이다. 이 기사단은 1530년에 몰타 섬에 이주해 왔으며 기사단의 수장인 장 드 라 카시에르 기사단장이 1573년 이 성당을 짓게 했다. 성 요한 대성당에는 수많은 예술 작품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지금까지도 원래 제작되었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참수>(1608)이다. 이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최초를 장식한 뛰어난 예술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가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몰타 기사단장의 궁전( alace of the Grand Masters)
16세기에 완성한 몰타 기사단장의 저택. 몰타 기사단은 요한 기사단의 후신으로 1530년에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부터 몰타를 양도받은 이래로 순례구호를 사명으로 했다. 15∼16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다. 현재는 대통령 집무실과 몰타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고조 섬 Gozo Island

지중해에 있는 몰타 령 섬 중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몰타제도(Maltese Islands)에 속한다. 몰타어로는 와데스(Ghawdex)라고 한다. 홍콩 섬과 비슷한 크기의 타원형 모양의 섬은 몰타의 중심으로부터 약 6km 북서쪽에 위치하며 중심 도시는 빅토리아(Victoria)로 약 6,414명이 거주한다. 그 외에 산로렌츠(San Lawrenz)와 제키야(Xewkija), 므가르(Mgarr) 등의 마을이 있다. 섬은 칼립소동굴(Calypso Cave)과 신석기시대에 세워진 쥬간티아 사원(Ggantija Temple), 신석기 시대의 지하사원 사라스톤서클(Xaghra Stone Circle), 붉은 오렌지 빛 모래와 청록색의 맑고 깨끗한 바다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해변 중의 하나로 알려진 람라만(Ramla Bay), 산블라스(San Blas) 해변 등으로 유명하다.

                                                                                                               
                                                                                                                  코미노 섬 Comino

코미노 섬(Comino, 몰타어: Kemmuna)은 몰타 제도에 속한 섬으로, 몰타 섬과 고조 섬 사이에 있다.‘코미노’는 커민에서 붙은 이름이다.



                                                                                                                  엠디나 Mdina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의 옛 수도이며 관광도시로 유명하다. 이전에는 ‘노타빌레(Notabile)’ ‘시타 베키아(Citta Vecchia)’ ‘시타 노타빌레(Città Notabile)’라고 불렀고 오늘날 현지 주민과 방문객들은 흔히 ‘ 엠디나(Imdina)’ ‘고요한 도시(Silent City)’라고 부른다. 몰타 섬 중앙의 구릉에 자리 잡은 중세 성채도시이다. 바로 옆에 라바트(Rabat) 마을이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BC 700년경 페니키아인(人)들이 처음으로 요새화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는 ‘말레트(Maleth)’라고 불렀다. 주로 몰타의 상류 계급층 주민이 거주하며 15~17세기에 지은 궁전들은 대부분 개인 주택으로 사용된다. 피아차(piazza) 광장과 성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 바울 성당(Cathedral of the Conversion of St. Paul)을 중심으로 유서 깊은 건물들과 골목들이 붙어 있다.


성 바울 대성당 [St. Paul's Cathedral]
아랍인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후 노르만 양식으로 세워졌으나 1693년 지진으로 무너졌다가 1702년 몰타 건축가 로렌조 가파( Lorenzo Gafa )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 성당 제단 위에는' 마티아 프레티' 의 프레스코화 < 성 바울의 난파 > 을 볼 수 있으며 성당 바닥 전체는 대리석 묘비들로 깔려 있다. 사도 바울이 탄 배가 이곳에 난파되면서 초기 기독교를 전파한 곳으로 사도 바울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했다는 동굴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라바트 Rabat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의 도시. ‘이르-라바트(Ir-Rabat)’라고도 한다. 몰타 섬 중서부, 몰타의 옛 수도 엠디나(Mdina) 바로 옆에 위치한다. 현재 도시의 중심부 반 정도가 로마시대에 엠디나와 함께 섬의 수도였던 멜리타(Melita)에 포함되었으며 나머지는 아랍인(人)이 몰타를 지배하던 당시에 조성되었다. 도시명은 아랍어(語)로 ‘교외’라는 뜻인데, 아랍인이 엠디나에 성벽을 쌓은 후 성벽 바깥지역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건물, 동굴교회, 교회, 수도원 등 중세시대의 유적이 많이 있다. 성 바울과 성 아가타의 지하묘지(Catacombs of St. Paul and of St. Agatha)는 로마시대에 사용된 곳으로,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교인들이 비밀리에 만나 미사를 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