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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중동 ,UAE, 우즈베키스탄)

기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9-29 11:06
조회
1467

                                                                                                       이집트 EGYPT

․인구 : 약 6,024만 명
․위 치 : 동북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기 후 : 아열대성 사막 기후

․면 적 : 1,002,000㎢(한국의 약5배)

․수 도 : 카이로(Cairo, 약1,500만 명)

․주요민족 : 아랍인(98%), 베드윈인, 누비아인

․주요언어 : 아랍어

․종 교 : 회교(92%), 기독교(7%)

․교 육 : 의무교육 9년, 문맹율 60%

․통 화 : 이집트 파운드(EGP 1)=80원(2021.11)


이집트만큼 풍부하고, 잘 보존된 과거를 소유하고 있는 국가도 드물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같은 이집트 유산은 고대 유물의 상징이다. 문명은 5,000년이 지났어도, 현대의 여행자들에게 이집트는 박물관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준다. 이집트의 국민들은 이집트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우호적이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관광자의 대부분은 피라미드를 보러 이집트를 가겠지만, 그 유물들만큼이나 매혹적인 이집트인들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현대 이집트는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요, 동서양과 신구의 교차로로서 인류문명의 보고이다.




[지 리]


이집트(Arab Republic of Egypt)는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사하라 사막 안에 놓여 있다. 북으로는 지중해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수단에, 서쪽으로는 리비아에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만 (the Gulf of Aqaba)과 홍해를 접하고 있다. 이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이집트는 고대부터 세계 무역의 핵심이 되었다. 이집트는 100만㎢(386,100평방 마일)을 차지하며, 스페인의 두 배, 한반도의 4.5배의 크기인데 국토의 90%가 사막이다. 나일강은 서쪽 사막의 모래 언덕과 산악지역인 동쪽 사막을 가로지른다. 이 두 사막 지역과 나일 언덕 그리고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의 주요 네 지역이다.

[기 후]

카이로를 비롯한 내륙이 아열대 기후, 지중해 연안이 지중해서 기후이다. 알렉산드리아가 연간 강수량 190mm, 카이로는 25mm 정도이다. 기온은 여름에 사막에서 37~48℃, 온화한 지중해 연안에서도 32℃에 이른다. 겨울에는 대체로 따뜻한 편이지만, 바람이 불면 매우 쌀쌀하다. 특히, 심한 모래바람이 부는 때도 드물지 않은 편인데 이런 때에는 항공기의 운항이 중단되기도 한다.이집트의 대기는 건조하면서도 상쾌하다. 가장 더운 날에도 이집트보다 북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이면 종종 겪는 숨막힐 듯한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 나일 삼각주 지역의 겨울 평균 기온은 대략 섭씨 13도 선에서 오르내리고, 계곡 상류지역에서도 대략 19도 정도이다. 여름 평균기온도 28도 정도이고, 때로 최고 기온이 50도에 달하기도 하지만 밤에는 항상 서늘하고 습도는 극히 낮다. 삼각주 지역을 제외하면 비는 거의 오지 않지만, 물의 부족은 매년 7월에서 10월 사이에 발생하는 나일강의 홍수가 해결해 준다.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나일강 상류지역에는 말라리아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말라리아는 해안 지역에서도 사실상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바람의 방향 역시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년 중 3/4이상의 기간에 바람은 북쪽으로부터 나일강의 흐름과 반대로 부는 바람의 추진력에 힘입어 상류로의 운송은 하류로의 운송에 비해 별로 어려움을 지지 않는다. 고대의 이러한 환경은 이집트인으로 하여금 나일강 물줄기를 이용한 교류를 촉진하는데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리적 영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우량의 부족이 두 지역에서 창의력과 발명 기술을 자극했다는 사실이다. 주기적인 강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수확을 거두기에는 토양의 수분이 충분치 못했다. 홍수가 물러간지 몇 주일 뒤에는 땅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므로 비옥한 토양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관개가 필수적이었고, 그 결과 이집트에서는 정교한 댐과 관개용 운사체계가 지금으로부터 5천연 전에 이미 구축되었다. 이러한 계획들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수학적 기술, 공학적 능력, 사회적 협동 등은 다른 목적에도 활용되었을 뿐 만 아니라 문명을 이룩하는데도 기여했다.

[사회문화]

전체 인구는 64,824,466명 (2005.1)이며, 이중 94%가 수니파 회교도이고, 6%가 기독교이다. 나세르에 의해 1953년부터 공화제가 채택되어, 1971년에 이슬람교를 국교로 한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를 내새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식언어는 아랍어이며, 영어와 불어도 통용된다. 정식 국명은 이집트 아랍 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

[시 차]

한국보다 6시간이 늦다.

                                                                                                                 카이로 CAIRO

카이로(CAIRO)는 이집트의 수도일 뿐 아니라 아프리카 최대의 도시, 그리고 동서양, 아프리카 3개 문화의 교차점이기도 하다. 카이로 거리의 소란이 곧 그 도시가 가진 활력의 척도라면 카이로는 틀림없이 활력이 넘치는 도시이다. 아라비아어로 승리자란 뜻을 가진 카이로는 1000년을 넘는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시가의 중앙을 꿰뚫고 흐르는 나일강은 역사의 전달자. 연간 강우량은 30mm 미만, 인구는 900만이 되는 카이로의 하늘은 언제나 푸르다. 

․ 카이로 평균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20.4

22.3

20.7

25.9

32.5

34.2

35.7

34.6

32.8

28.2

24.6

20

평균강수(㎜)

9.9

11.9

10.7

14.2

18.2

20.6

23.7

23.6

22

18.4

14.3

12.1



고고학 박물관(Egytian Museum)


타흐리르 광장의 북쪽에 있으며, 정면에는 카이로 최대의 버스 텀널이 있고, 서쪽에는 나일 힐턴 호텔이 우뚝 서 있다. 문을 들어섬녀 정면에는 연못이 있고, 상이집트의 상징인 파피루스와 하이집트를 대표하는 로터스(연꽃)가 심어져 있어서, 이집트 전부를 상징한다. 1857년 프랑스인 이집트 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당시의 지배자 사이드 파샤에게 진언한 덕분에 만들여 졌다. 소장품의 수는 10만점이 넘지만 공간부족으로 어수선해보인다.
기제(Gizeh)의 피라미드


기제는 카이로 시가에서 서쪽으로 13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 시가의 변두기, 사막과의 경계에 홀연히 웅대한 모습을 드러낸느 것이 곧 기제의 3대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는 이집트를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카이로에서 피라미드까지 외길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거리의 종점에는 왼쪽으로 돌아 비탈길을 오르면 쿠푸왕의 피라미드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따위에서 보면 3개의 피라미드가 이웃해있지만, 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관람에는 3시간이 걸린다. 쿠푸왕의 파라미드와 카프라 왕의 피라미드 멘카우리 왕의 피라미드를 볼 수 있다.
스핑크스(Sphinx)


3대 피라미드의 남북으로 중앙, 동서로는 약간 동쪽으로 피라미드 못지 않게 유명한 거대한 석조건축 스핑크스가 위엄을 보이고 있다. 몸은 사자, 머리는 사람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높이 21m, 길이 57m. 매일밤 19:30과 20:30의 2회에 걸쳐 스핑크스 앞에서 음향과 빛의 쇼가 펼쳐진다. 조명에 의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떠올라 보이는 가운데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설명해 준다.
아기예수 피난교회(The Church of Abu Serga, Old Cairo)


아기예수 피난교회는 요셉, 마리아와 아기예수 성가족이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하던 중 머물던 성스러운 장소에 건축된 것이다. 이들은 요셉이 이 지역 요새에서 일하는 도중에 이곳에 살았을 것이다. 건축 당시 이 교회는 AD 303년 시리아에서 로마 황제 막시밀란(Maximilan)의 손에 순교당한 성자이자 군인인 Sergius와 Bacchus에게 바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피루스 연구소 (Dr Ragab's Papyrus Institute)


전 영사관을 지낸 하산 라가브 박사가 세운 연구소이다. 이 연구소는 기자에 있는 세라톤 호텔 근처에 집 같이 생긴 배위에 있다. 여기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종이 제작기술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1층에는 파피루스 위에 그려진 파라오의 그림들을 판매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는 일반 전시회를 위해 회랑도 마련해 두었다.


                                                                                                      룩소 LUXOR

룩소르는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1시간, 열차로는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거리이다. 고대 왕국의 수도 테베의 일부인 룩소르는 최 전성기 1500 B.C.에는 인구가 1천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전해지며, 호머의 '일리아드'에도 그 화려함이 묘사돼 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카르낙 신전과 룩소 신전이 거대하게 장엄함을 뽐내고 있으며 오벨리스크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 둘 중 하나는 나폴레옹 침공시 프랑스로 옮겨져 현재는 파리의 뽕피두 광장에 있다. 그래서 인지 룩소르의 분위기는 무언가 빠진듯한 어설픈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룩소르는 나일강에 의해 동서로 대별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뜨는 나일강 동쪽에 신전을 지었고, 태양이 지는 서쪽은 주로 묘지나 제전 등을 지었다. 따라서 나일강 서쪽은 사자(死者)의 도시,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이며 이곳에 그 유명한 왕들의 계곡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피라미드 시대 다음인 1580-1085 B.C.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굴 방지를 위해 깎아지른 듯한 암벽 위에 조그만 구멍을 파고 그 지하에 미로(迷路)로 연결된 보물 창고, 분묘 등이 있고 바위 표면을 뚫어 신전을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64기가 발견되었고 그중 9기만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투탕카멘의 영면을 지켜볼 수 있으며, 그밖에 투트메스 3세, 세티, 람세스 3, 6, 9세의 무덤을 살펴 볼 수 있다. 계곡을 달리하면 여왕의 무덤, 귀족 무덤, 장인(匠人) 무덤 등이 형성돼 있고, 장제전, 멤논 거상(Colossi of Memnon)이 나일강을 향해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왕릉을 관람하고 내려오면서 규모는 작지만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귀족 무덤을 볼 수 있고, 계곡 너머에서 여왕의 무덤과 장인의 무덤들을 관람할 수 있다. 귀족 무덤에서 '델 엘 메디나'(왕들의 계곡을 건설한 노동자 마을)를 지나면 '하트셉수트 장제전'(Deir el Bahari)을 만날 수 있다. 여왕 하트셉수트(Hatshepsut)는 남편 투트메스 2세가 죽은 후 나이 어린 투트메스 3세를 섭정했으며 후에 스스로 파라오가 되었다. 이 장제전은 여왕의 시아버지 투트메스 1세의 부활과 그녀 자신의 부활을 기리며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거대한 제전 중 하나이다. 15-16세기에는 그리스 교도들의 교회로 이용되었고, 여왕의 탄생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장제전을 뒤로하고 나일강 쪽으로 더 내려오면 폐허가 된 두 개의 거상(巨像)이 나란히 앉아 있는 데 이것이 유명한 멤논 거상이다. 이는 아메노피스 3세가 1411-1375 B.C.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20m에 달하는 의자에 앉은 모습을 한 거대한 스핑크스(sphinx)이다.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 만큼 떨어져 나갔고, 거상 뒤에 있었다는 신전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카르낙신전 (GREAT KARNAK TEMPLE)
카르나크에 신전에 몇군데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아몬 대신전은 이집트에서 최대 규모이다. 특히 그 크기에 압도되는 것이 대열주실이다, 입구에서 스핑크스 참배의 길, 제1탑문, 제2탑문으로 가는 근처에 있다. 높이 23m, 15m 두 종류의 큰 기둥이 134개나 늘어서 있는 것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또한 카르나크 신전에서는 매일 빛과 소리의 나이트 쇼를 즐길 수 있다. 쇼는 입구 부근, 제2탑문 앞, 제7탑문 앞, 그리고 성스러운 연못 등 광대한 신전 안을 빛과 소리로 안내하면서 진행된다. 소리도 매우 깊이 있는 스테레오이므로 대단히 박력있다. 마지막으로 성스러운 연못에 설치된 무대에서 보는 하늘의 별도 훌륭하다. 한여름 이외에는 매우 추우므로 충분히 준비해 가야 한다.
룩소신전 (The Temple of Luxor)
고대 테베에서는 많은 제전이 있었다. 룩소로에 있는 룩소르 신전도 이러한 제전을 치르는 가장 중요한 사원 중의 하나였다. 원래 이곳은 카르낙 신전의 부속 신전으로 건립되었다. 대부분은 아멘호텝 3세와 람세스 II세에 의해 세워졌고, 이 사원은 그러한 제전의식을 준비하는 적당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제전은 통치자이자 신성한 존재인 파라오와 백성들과의 친목도모에 목적이 있었다. 제18왕조에 이르러 이러한 제전은 11일간 지속되었고, 제20 왕조의 람세스 3세에 이르러서는 27일간 치뤄졌다.
멤논의 거상 (Colossi of Memnon)
멤논의 거상은 19.5m 높이의 거상으로 2개의 좌상 중의 하나이다. 멤논(Memn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오스(Eos)와 티토노스 (Tithonus)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에티오피아의 왕으로 트로이 전쟁 때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를 도우러 갔다가 그리스군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날 이른 아침 햇살이 비칠 때 이 상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났는데,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멤논 왕이 그의 어머니 이오스에게 인사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2개의 거상 중 하나가 멤논과 닮았다고 하여 멤논의 거상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왕가의 계곡 (The Valley of the Kings)
신왕국 시대의 제18 왕조에서 제20왕조까지의 왕들의 묘소로 만든 일종의 파라오들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연대로 추정해 볼 때 BC 1600년에서 BC 1200년까지로 이 계곡의 무덤은 일반 피라미드 양식과 조금 다른 암굴을 파서 만든 분묘로 부활을 위해 미이라가 도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원의 안식처로 이곳을 처음으로 선택한 최초의 왕은 투트모시스 I세로 자신의 묘가 도굴되는 것을 막기위해 이곳을 선택했다. 그러나 왕가의 골짜기에 있는 많은 묘소들은 대부분 초기에 도굴당하고 하워드 카트가 1922년에 발굴한 투탕카멘 왕의 무덤까지 64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멤피스 (MEMPHIS)

고대 이집트의 도시로 나일강 서안에 위치하며, 오늘날 카이로 남쪽 25 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멤피스는 기원 전 3500년 전 메네스에 의해 건립된 통일 이집트 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당시는 남북 이집트의 행정적인 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 당시에 멤피스는 나일 델타의 지정학적인 정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멤피스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제국도시로 기록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 멤피스는 이집트의 수도였고, 멤피스의 북쪽에 있는 네크로폴리스는 기자와 사카라와 관련된 인상적인 유적을 남겼다. 제25왕조에 이르러 멤피스는 다시 한번 중요한 도시가 되는데, 이 시기의 수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람세스 2세의 상
고왕국 시대의 수도로 번창했던 멤피스이지만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프타신을 제사 지내던 신전의 발자취만이 남아있다. 여기서 발견된 것이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인데, 다리의 일부는 훼손되었지만 거의 완전한 상태로 현대에 되살아났다. 지금은 멤피스 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높이는 15m인데, 반 듯하게 뉘어져 있기 때문에 관람객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2층에서 내려다 보게 된다. 몸의 곡선은 거의 동양의 불상을 연상시키리만큼 매끄러워, 수천년 된 조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옛길의 건너편에는 성스런 소, 아피스(Apis)의 미리를 만드는데 쓰인 해부대가 놓여 있다.
사카라 피라미드
초기 왕조 시대부터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많이 만들어진 사카라에서도 제제르 왕의 계단 피라미드는 특히 훌륭하다. 피라미드를 중앙에 놓고 그 주위를 둘러싼, 이른 바 단지의 크기는 동서 227m, 남북 545m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주랑 사이의 좁은 통로가 50m쯤 이어진다. 기둥의 연속도 볼 만하지만 광장에 나서면 남쪽 정면으로 보이는 해목은 피라미드가 인상깊다. 고왕국 시대 제3왕조 제제르 왕의 대신이었던 임헤테프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기저부가 128X140m, 높이 약 60m이다.6단의 단층을 가진 이 계단과 피라미드는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이다. 주랑의 북쪽과 피라미드의 북쪽에 각각 신전이 이어져서, 광대한 피라미드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바깥쪽을 두른 벽에 올라가면 주변의 마스터바 고분군과 붕괴된 옛 피라미드의 자취가 보인다.


                                                                                                                시내산 MT. SINAI

불모의 삼각주,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홍해를 끌어안은 땅,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순례의 땅 시나이 반도. 인공위성 사진으로 바라본 시나이 반도는 푸른 색채 하나 보이지 않는 무인지경의 사막지형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시나이 반도(시내 반도), 모세산이라 불리는 시나이산(시내산)에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6시간 만에 도착한다. 시나이 반도는 수에즈만과 아카바만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반도로써 남부는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의 시나이산이라 불리는 험한 산악지대이고 북부는 황량하고 뜨거운 광야이다.넓이 6만 1천㎢의 이 광활한 땅에서는 생명이 살기도 쉽지 않다. 낮에는 작열하는 강한 햇빛이 내리 쬐고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한다. 4만여 명의 베두인족 들만이 이곳 각처에서 살고 있다. 계곡이 거의 없어서 물을 구하기도 어려운 곳이지만, 이곳에도 대추야자, 옥수수 등이 재배되고 있는 옥토가 있다. 파이란 오아시스(Fairan Oasis)로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다. 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베두인족들은 낙타, 양, 염소 등 가축들을 키우며 유목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육상 통로일 뿐 아니라 지중해 저편, 유럽 대륙이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홍해와 인도양 뱃길을 따라 동양으로 갈 수 있는 선박로이자 문화의 교량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예로부터 시나이 반도는 문화 교류와 교통로로써 중요한 땅이었으며 국제적 사건들이 계속되어왔다.이스라엘인들의 광야생활 40년의 무대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약속의 땅인 시나이산은 이곳 시나이 반도 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코란에서도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시나이산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언급되어 있어 사실상 시나이 반도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공동 성지이다. 베두인족들의 유목의 터전, 불타는 듯 뜨거운 광야가 펼쳐지는 이곳 ‘위대한 광야’의 성산을 찾아 세계인들의 순례의 발걸음 이어지고 있다.

여명을 알리는 시각, 파르스름한 새벽이다. 새벽 2시에 출발하여, 아직 어두운 5시 가까이 되어서야 도착한 시나이산 정상. 오르는 도중에는 그 길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떻게 그 길을 올랐는지 알 수가 없다. 칠흑 같은 어둠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찾아든 사람들이 새벽을 가르며 오른다. 붉은 해가 힘차게 대지를 향해 오른다. 시나이산에 해가 솟아오른다. 붉은빛이 감돌고 울퉁불퉁 골이 진 화강암으로 뒤엉킨 산줄기가 아침 햇살을 받아 장엄하다. 신비로운 생동감을 품은 정상의 골짜기는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겨 다양한 색채로 변신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카메라 세례에 태양은 더욱 붉게 떠오르고 있다. 그 순간, 홍해 골짜기에는 성스러운 축복을 기리는 수많은 영혼들의 기도가 울려 퍼지고 있다. 새벽에 오른 길이 아스라히 보이는 순간이다. 모두들 묵묵히 올라 정상에 선다.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벅찬 감동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렇게 시나이 반도 시나이산 정상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 또 하나의 창조의 하루를 시작한다.

시나이 반도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 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 16:35),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 (민 11:31)>,수에즈만과 아카바 만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반도로써 남부는 험한 산악지대이고 북부는 황량한 광야이다. 넓이 6만1천 평방 Km 의 시나이 반도는 낮에는 작열하는 햇빛이 내리 쬐고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 한다. 약 4만 명의 베드윈족들만이 이곳에서 살고 있으며 계곡이 거의 없어서, 물을 구하기 힘들고 대표적인 오아시스로는 파이란 오아시스가 있다. 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베드윈족들과 가축이 살고 있다.모세가 애굽에서 팔레스틴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통과한 곳이 이곳이고 아라비아의 유목민인 아말렉족과 싸움을 벌인 곳이며, 이스라엘 자손들이 40년 동안 유랑하며 하나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던 곳도 이곳이다. 겉으로보면 아주 쓸모가 없는 땅으로 보이나 이 땅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도 각양 각색이다. 신학자들은 성서의 땅 (LAND OF BIBLE)이라 부르고 지리학자 과 기타의 학자들은 매혹의 땅 (ENCHANTMENTS)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영결하는 육상 통로 일뿐 아니라 지중해 저편에 있는 유럽 대륙이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홍해와 인도양 뱃길을 따라 동양으로 갈 수 있는 교량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예부터 이 땅은 문화 교류와 통상 교통로 로서 아주 중요한 땅이었던 관계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임 없이 계속 되었다.그 중에서도 모세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과 출애굽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겠다. 현대의 시나이 반도 내의 아스팔트 길과 전통적으로 말하는 출애굽의 길은 꼭 일치 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시나이 반도와 나일 계곡 (아라비아 사막)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해저 터널을 지나서 15 Km 정도 남행하면 대추 야자 나무가 무성한 조그만 오아시스가 하나 나오는데 이곳을 아랍어로 오윤 무사(OYUON MUSA)라고 부른다. 여기가 성서상의 마라(출 15:23)이다. 여기서 계속 수에즈만 (홍해)를 따라 남행하여 라스 사라팁이라는 삼거리를 지나 내륙으로 뻗어 있는 와디 파이란 (WADI FAIRAN) 계곡을 계속 따라 가면 성 캐더린 수도원에 이르게 된다.그리고 라스 사라팁에서 우측길로 60 Km 정도 더가면 엘드어(EL TUR)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엘림(출 15:27)으로 간주되는 장소로 종려나무 70여주와 12개의 샘이 있고 비잔틴 시대의 찬란했던 흔적은 간데 없으나 4세기 때 건립 된 조그만 교회가 하나 남아 있다. 다시 삼거리에서 성 캐더린으로 가는 길인 와디 파이란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파이란 오아시스(FAIRNA) 에 도착한다. 이 오아시스가 성서의 르비딤 (REPHIDIM)인데 이곳이 이스라엘이 출애굽후 처음으로 아말렉 족 (AMALEKITES)와 여호수아 (JOSHUA)가 전쟁을 치룬 곳이다.(출 17:8-16) 이계곡을 와디 히브린 (WADI HEBRAN)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히브리(유태)가 지나 갔다는 뜻이다.



․파이란 오아시스

파이란 오아시스는 길이가 4 Km 정도인데 시나이 반도 내에서는 가장 큰 오아시스이다. 그리고 와디 엘세이크 (WADI EL SHEIKH)로 들어가 50 Km 정도 가면 성 캐더린 수도원이 나온다. 이 수도원 자리가 호렙산 아래인데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장소이다.(출 3:1) 모세의 출애굽 600년 후에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 (ELIJAH)도 호렙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대화 하였던 성산이다.(왕상 19:9-18) 시내산에 오르는 길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수도원의 수사들이 만들어 놓은 가파른 3570계단의 길과 완만한 능선으로 된 길로서 정상까지 3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된다.이곳에는 해발 2285 m 의 모세산을 비롯하여 해발 2637 m의 세르발 산등 해발 2000 m 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 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 뿐이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성산 (The Holy Mountain)인 호렙산 정상에는 기원 4세기 경에 세워졌던 조그만 교회 자리에 1934년에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수도원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와디 마라(Wadi Mara) 계곡을 따라 나가면 아인 후드라 (Ain Hudra)라고 불리는 신광야 (성서상으로 바란 광야라고도 한다) 일부를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동쪽 해안인 아카바 만을 향해 계속 내려가게 된다. 아카바 만의 누에바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75 Km 를 가면 이스라엘과의 국경인 타바에 도착하게 된다.시나이 반도 북쪽 지중해 연안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인 라파에서 수에즈 운하의 콴타라 까지 펼쳐지는 모래 벌판이 돌산들이 즐비한 남쪽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곳이 고대로 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통상로 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하였는데, 모세 출애굽 사건 후 1200년 후에 아기 예수님과 그의 가족이 이 길로 해서 평화의 땅을 찾아 피난 하였다. (마 2:13-15)



․ 성 캐더린 수도원

4세기 초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 당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다. 그녀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황제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마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고 되고 순교를 하게 된다.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 반도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진다.이 사건 이후 시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수도원의 역사적 배경은 3세기 중엽부터 수도사들이 찾기 시작했고, A.D. 330년에 헬레나 모후가 불붙는 떨기나무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짓는다.4세기 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고 5세기 중엽에는 시나이 교구가 성립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요새화된 장방형의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이 수도원이 완성 된 것은 A.D. 557년이다. 7세기 때 아랍인들이 점령을 해서 수도사들이 30명까지 줄어들었다가 수도원장이 모하메드에게 수도원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였고 모하메드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십자군들이 등장함에 따라 수도원은 서방세계의 기독교와 아랍 지역의 모슬렘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197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 했을 때도 수도원은 보호되었다. 이곳은 또한 이콘이라고 불리우는 목판 성화의 보고이며 2000여 개가 넘는 이콘들이 보관 되어 있다. 성 캐더린 수도원 내에 있는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주후 6세기 중엽에 건설 되었다. 이 교회로 들어가는 나무 장식 문은 건립 당시 만든 문으로써 1400년 이상 된 문이다. 교회 안에는 12 기둥이 있으며 이것은 12 달을 의미한다. 기둥 위에는 그 달의 성자 이콘이 있다.이 교회 제단 뒤에는 불붙는 떨기나무의 기념 예배당이 있고 이곳은 지금도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나타낸 교회 전단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는 왼쪽부터 엘리야, 요한, 예수님,베드로, 야고보, 모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 둘레에는 12 제자, 12 예언자, 건축 당시의 수도원장 롱지너스, 집사 요한등 모두 26명의 모습이 둘러져 있다. 교회 근처의 떨기나무는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라나는 특수한 종류로써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 사해 주변 지역 성지

사해(Dead Sea)

아랍어로 '롯의 바다'(Sea of Lot)라고 불리는 사해는 길이 75㎞, 폭 6-16㎞ 정도 되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해면하 약 400m)이다. 일반 바다의 염분 함유율이 4-8% 인데 반해 사해바다는 염분 함유율이 28-33%가 넘는다. 이러한 특성으로 성경에서는 '소금바다' 즉 '염해' 로 언급되며, 동쪽의 바다라 하여 '동해' , 또는 '아라바해' 로도 불렸다. 동물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사해(Dead Sea)' 라고 불리고 있다. 염화 마그네슘, 나트륨, 칼슘, 포타슘, 브로마이드, 깁슘 등 풍부한 광물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바닷물이 증발하므로 광물질만 농축된다. 이 광물질을 이용한 사해 화장품은 요르단의 또다른 자랑거리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나타나는 욥의 고향인 '동방'을 이 지역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관련 성경 : 창 14:3, 민 34:3-12, 수 3: 16, 수12:3, 수 15:2-5, 수 18:19, 수 3:16,겔 47:18, 욜 2:20

고르 엣 사피(Ghor es Safi) : 롯의 고장

아라바 지역의 황량한 사막지대와는 대조적으로 사해의 남동편 지역은 나무가 우거진 푸른 들이 펼쳐진다. 요르단 남부의 경작지 고르 평야 지대이다. 이곳은 성경 창세기 14:2의 소돔, 고모라, 아드마, 소보임, 벨라(소알) 등의 다섯 작은 왕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성경의 기록에 따라서 이곳 사피 지역을 롯의 고장이라고도 부른다.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져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오게 되는데, 성경은 이곳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이전에는 애굽땅과 같고 여호와의 동산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소알 땅은 비잔틴시대 때는 주라(Zoora)로 불렸고, 마다바의 모자이크 지도(Zoar)에서도 볼 수 있다. 조가르(Zoghar)라는 아랍 지명은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설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키르벳 쉐이크 이사 : 소알

소알 성의 유적지는 와디 엘하사에서 남쪽으로 4㎞ 떨어진 설탕공장이 있는 '키르벳 쉐이크 이사' 로 불리우는 언덕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이곳에는 마멜룩 시대의 건물의 기초가 약간 남아 있을뿐 어떠한 유적도 찾아볼 수 없다.

카하프 롯 : 롯의 동굴( cave of Lot)

고르 엣 사피의 북동쪽 언덕, 고대 소알 땅이 보이는 한 언덕에는 '롯의 동굴'(카하프 룻, cave of Lot)이라고 불리는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유적지가 발굴되어 있다. 마다바 지도에는 이곳을 '성 롯의 수도원' 으로 적고 있다. 이 동굴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시에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난 후, 롯이 그의 두 딸과 피신했던 동굴로 알려져 있다. 비잔틴 시대 때의 교회 터와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롯의 동굴을 중심으로 지어졌던 교회당의 모자이크도 거의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중기 청동기 시대를 전후한 유적과 기원 후 8세기 아랍 왕조의 유적도 발굴되고 있다.

밥 엣드라(Bab edh Dhra) : 소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된 유적지로 소돔의 후보 지역이다. 성벽을 갖추었던 전형적인 고대 도시로, 그 건설 시기는 기원전 2600년 경으로 보고있다. 두터운 진흙 벽돌 및 신전의 자취가 남아 있다.

텔 누메이라(Tell Numeira) : 고모라

일부 학자들에 의해 고모라 지역으로 지목받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이다.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던 고대 도시이며 기원전 2350년경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흙벽돌로 쌓은 성벽의 흔적과 돌 무더기가 남아 있으며 텔의 남쪽 200m 지점에는 누메이라 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망대도 남아 있다.

와디 아라바(Wadi Araba)

아라바는 '거친 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아라바는 본래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부터 아카바만까지 움푹 갈라진 지형을 가리키는데, 오늘날은 사해에서 홍해에 이르는 지역을 아라바로 부르고 있다. 아카바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되는 지점까지 약 200m 가량 올라가다가, 거기서 사해까지는 약 600m 정도 내려가는 지형으로 되어 있다.동쪽의 에돔 산지와 서쪽의 네게브 산지 사이에 위치하는 아라바는 전 지역이 사막 지역으로서 몇 군데 오아시스 지역만을 제외하고는 정착이 불가능하였으나, 대상 무역로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사해 남쪽 36㎞ 지점에는 키르벳 나하스라는 구리 광산의 흔적이 있다. 이 구리 광산은 솔로몬 시대 이후에 사용되었던 것이며, 근처의 키르벳 자리야, 키르벳 네낍 아세이메르 등도 다 구리 광산이었다.



                                                                                           요르단 JORDAN


. 개요 :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 있는 아랍왕국
․ 수도 : 암만 (Amman)

․ 언어 : 아랍어

․ 기후 : 지중해성기후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92%, 그리스도교 6%

․ 인구 : 약 620만명 (2008)

․ 통화 : 요르단 디나르 (1 JOD) = 1,800원 (2021.11)


[개 관]

아시아 서남부에 있는 입헌군주국. 정식 명칭은 요르단이슬람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으로, 아라비아반도 북부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26㎞이다. 면적은 9만 269㎢, 인구는 619만 8,677명(2008년 현재), 수도는 암만(Amman)이다.

종족구성은 아랍인이 98%, 아르메니아인이 1%, 체르케스인이 1% 등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며, 종교는 92%가 이슬람교(수니파), 기독교 6%, 기타 2%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광공업을 들 수 있으며, 중동 내륙의 교통중심지로서 국제항공노선과 통신망이 발달되어 있다. 경제적으로는 요르단 서안지역의 상실로 농지뿐 아니라 관광자원마저 잃었으며, 인근 아랍산유국으로부터의 원조 규모가 줄어들어 경제불황이 지속되고 있다. 2007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60억 1,100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975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국왕중심제의 입헌군주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국왕이 임명하는 상원(55석)과 임기 4년의 하원(110석)으로 구성된다. 주요 정당은 이슬람행동전선(IAF), 국민의회행동전선(NPAF), 무소속진보그룹, 알와탄 등이다.

[역 사]

이 나라는 1세기부터 6세기까지 기독교문화권에 속하였으나 636년 이후 사라센제국의 판도에 편입되었으며, 11세기의 100년간은 십자군의 지배로 다시 기독교문화권에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슬람문화권에 속하고 있다. 1916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아왔으며, 1946년 5월 25일 독립하여 왕국이 되었고, 1952년 1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1967년 6월 ‘6일전쟁’ 때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게 상실하였다. 입헌군주국이기 때문에 정부형태는 국왕중심제이며, 세습제로 즉위하는 국왕이 국가정책 결정과 집행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정당은 1976년 이래 존재하지 못하다가 1992년 8월 정당법이 상하 양원에서 성립되어 합법화되었다. 현 압둘라(Abdullah) 국왕은 1999년 2월 7일 즉위하여 집권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팔레스타인계 주민과 원주민인 베드윈 부족간의 갈등이 잠재화되고 있어 정치·사회변동의 요인이 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55년 유엔에, 1964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페트라 PETRA

암벽 속에서 꽃피운 나바테 문명 페트라는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던 캐러밴 도시이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했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니 페트라는 바위의 도시인 셈이다. 애급(埃及, 이집트)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이 BC 7세기 무렵 페트라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나바테 문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106년에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땅을 빼앗겼다가,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잊혀진 도시, 12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다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탐험 도중 젊은 탐험가 부르크하르트는 페트라에 엄청난 유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아랍인으로 변장한 후 이곳을 찾아 나선다. 1812년 그는 잊혀진 도시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를 유럽에 알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이곳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졌다.




                                                                                                         암만 AMMAN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요르단강 동쪽 75km 지점, 아라비아 고원의 서쪽 끝 높이 약 800m의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암만은 BC 5세기경부터 있었던 옛 도시로, 성서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하나, 유적으로는 몇 개의 분묘만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고, 그 후 로마 ·비잔틴 시대에는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특히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과 헤라클레스 신전 및 해안에 있는 님프의 폐허가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아밀 압둘라가 이곳에 정부를 수립하고 수도로 정했으며, 팔레스타인 전쟁 때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세력의 중심지로 아랍 군단이 주둔하기도 했다.

인산염 ·건축용 석재 ·채소 ·과일 등의 집산지이며, 사막의 주민과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중심지이다. 시내에는 궁전 ·관청 ·법원 ·병원 ·의회 등을 비롯하여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특히 고대의 성채는 고고학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건물의 대부분은 석조건물로, 도시의 남서쪽에는 대리석 채석장이 있다. 예로부터 성지 메카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숙박지로 발달하였다. 현재는 순례철도가 다마스쿠스로부터 이곳을 지나, 남쪽의 만 ·아슈타르로 이어진다. 포장도로로 다마스쿠스 ·만 ·예루살렘 ·바그다드 등지에 연결되며 암만 국제공항이 있다.



                                                                                                           제라시 유적 Jerash Ruins

제라쉬(Jerash)는 로마시대 10개의 위성도시(데카폴리스) 중의 하나로 암만 북쪽 4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그레코 로만(Greco-Roman) 도시 중의 하나이며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되었다. 동양의 폼페이 또는 1,000개의 기둥도시라고도 불린다. AD 6세기경에는 14개의 기독교 교회가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융성하였으며, 그 후 AD 614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그리고 AD 635년에는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AD 726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후 1806년 독일인(Seetzer)에 의해 발견되어 1920년부터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입구에는 AD 12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돌아가는 헤드리안 장군을 기념하여 세운 13m 높이의 개선문이 웅장하게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둥그런 광장과 5,000석 규모의 로마식 극장이 있으며 75개의 각주가 길 양편으로 서 있는 중앙도로 그리고 제우스, 아테미, 림프신전, 비잔틴 교회 유적 등이 남아 있다.



                                                                                         이스라엘 ISRAEL 

․수도 : 텔아비브(Tel Aviv)
․인구 : 약 590만명

․면적 : 20,766㎢(가자지구 및 1967년 전쟁이후 점령지 제외, 한반도의 1/10)

․주요도시 : 예루살렘(Jerusalem, 63만명),하이파(Haifa), 밧세라(Beershera), 에일랏(Eilat)

․주요민족 : 유태인, 아랍인, 드루즈인

․주요언어 : 히브리어(공용어), 아랍어, 영어

․종 교 : 유태교(85%),회교(12%),기독교(2%),드루즈교등 (1%)


팔레스티나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로 그 역사는 변화가 많았다. 유대인의 조상 이스라엘인이 정주했던 것이 기원 전 20세기이며 기원전11세기에 헤브라이 왕국이 건설되어 후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야왕국으로 분열되고 양국 모두 앗시리아, 신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되어 '바빌론의 유수'로 고통을 받았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제국의 보호하에 유다 왕국을 수립하였으나 로마에 저항했었기 때문에 탄압당하고 유태인의 2,000년에 걸친 세계 유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세기후반에는 시오니즘 (유태인이 그 근거지를 팔레스티나로 정하려고 하는 근세의 운동)을 일으켜 제 1차 대전후 영국의 위임 통치령을 거쳐 1948년에 건국을 선언, 1988년에 독립 40주년을 맞이하였다.팔레스티나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로 그 역사는 변화가 많았다. 유대인의 조상 이스라엘인이 정주했던 것이 기원 전 20세기이며 기원전11세기에 헤브라이 왕국이 건설되어 후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야왕국으로 분열되고 양국 모두 앗시리아, 신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되어 '바빌론의 유수'로 고통을 받았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제국의 보호하에 유다 왕국을 수립하였으나 로마에 저항했었기 때문에 탄압당하고 유태인의 2,000년에 걸친 세계 유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세기후반에는 시오니즘 (유태인이 그 근거지를 팔레스티나로 정하려고 하는 근세의 운동)을 일으켜 제 1차 대전후 영국의 위임 통치령을 거쳐 1948년에 건국을 선언, 1988년에 독립 40주년을 맞이하였다.



[기 후]


이스라엘의 기후는 온대성 기후와 열대성 기후로 뚜렷하게 교체되는 계절현상을 보여준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이라 1년중 4월에서 10월 사이엔 덥고 건조한 긴 여름이 계속되며,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의 겨울은 온난 다습하며 비도 많이 온다. 해안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여서, 여름에는 32~37℃까지 올라간다. 한편, 갈릴리,예루살렘, 사페드 등의 고원지대는 더욱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를 보이며,여름에 지내기 쉽고 겨울에도 간간이 내리는 비사이사이에 밝은 태양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부의 네게브 지방은 사막기후로, 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며, 대체로 겨울에 지내기 좋은 기후이다.

[사회 문화]

주후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그리고 주 후 2세기의 바르코흐바의 봉기를 계기로 세월이 흐르면서 급격히 유대인 인구는 줄어들었다. 19세기에는 단 25만명 밖에는 살지 않았고 디아스포라 시절에는 극소수만 살았으나 1870년 이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돌아오기 시작, 1882년부터 1948년 사이에는 유대인 이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1948년에 878,000명이던 인구가 1990년에는 4,559,600명으로 늘어난다.이 곳에는 유대인 3,717,000명과 83만명의 아랍인, 두르즈족과 같은 소수 민족이 모두 같이 살고 있다. 반면 점령지역에 살고 있는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은 제외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인구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태어났기에 "싸브라(sabras)"라고 불리며 1/4정도가 유럽, 미주지역 등에서 온 사람들, 또한 1/4정도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써 대부분이 아랍국가들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다. 많은 나라들에서 이민을 온 관계로 인해 생겨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언어적인 갈등 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이들, 이민자들에게 현대 히브리어를 교육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와 같은 학교 교육과 군복무를 위해서는 특별한 교육기관과 기능이 필요했다. 이들 이민자들은 아쉬케나짐(ashkenazim)과 셰파르딤(shephardim)으로 나누어서 출신지역을 구분하고 있는데 유럽과 미국의 이민을 아쉬케나짐, 다른 지역 출신들을 셰파르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50%이상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텔아비브, 하이파 등의 도시에 모여있다. 26개의 도시가 유대인 도시이고, 두 개의 도시가 아랍, 여섯도시는 두 민족이 같이 살고 있다. 인구 밀도는 208.7명/제곱km이고 대도시로 갈수록 인구 밀도가 높다.

[언 어]

팔레스타인 (블레셋)은 아랍어, 유대인은 히브리어가 공식 언어이며 같은 나라, 같은 도시, 같은 동네에 살아도 서로의 말을 전혀 모를 정도로 민족적 특성이 강하다. 히브리어는 세계에서도 유서 깊은 고대 언어로서 벤 예후다(Ben Yehuda)에 의해 부활하여 현재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랑 생활지에서 영향을 받은 다양한 언어들도 통용되며 동유럽계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쉬도 사용한다. 1948년까지 영국의 신탁통치 하에 있어 영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종교적 특성]

이스라엘에는 종교에 따라 3개의 달력과 3개의 공휴일과 3개의 시간 개념이 존재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히 구약을 기준하므로 6일간의 천지창조 후 하루의 안식일을 갖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요일에 안식하며 영업시간은 09:00-17:00(월-금요일 )까지,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처음 설법하러 간 날을 시작으로 하는 히즈라 달력을 기준으로 하여 금요일이 안식일이며 09:00-13:00경 (토-목요일)까지 영업한 뒤 쉬었다가 저녁에 다시 문을 연다. 유대인은 출애굽한 달을 기준한 (출12:1-2) 달력을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로쉬 샤나(민29:1)를 새해 첫 날로 삼는다. 유대인의 달력은 한국인이 음력을 사용하듯 고유의 달력으로 계산하므로 종교 및 법정 공휴일은 해마다 변경된다. 유대인의 하루 계산법은 천지창조 구절 (창1장)을 기준으로 한다.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므로 안식일은 이틀에 걸쳐지며 이브(eve)의 개념이 존재한다. 또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이어서 회당 가는 것 외에는 일체의 노동을 금한다. 이 날은 버스, 기차, 비행기 모두 운행되지 않으며 엘리베이터 타기, 초인종 누르기, 기계 및 기구 만지기, 가스레인지 켜기, 카메라 셔터 누르기 등도 금지되며 음식도 미리 만들어 둔다. 유대인의 영업시간은 업무에 따라 다변화되어 있어 외국사람들에게는 낯선 점이 많다. 이스라엘에서는 생활은 곧 종교이며 관광객은 요일에 따라, 시간에 따라 방문지 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유대인은 식사도 종교적으로 하기 때문에 아주 독특하다. 코셔르(KOSHER)라고 하는 식사법인데 이는 레위기(11장)에 근원한 것으로 돼지고기,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생선(미꾸라지, 메기 등), 조개류, 갑골류 (오징어, 게 등)를 먹지 않고 새 중에는 타조, 까마귀, 갈매기 등을 먹지 않으며 소고기와 우유 또는 치즈를 함께 먹지 않는 등 전형적인 종교 율법 식사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공공식당에서 KOSHER를 지키는 식당인지를 게시하여야 한다. KOSHER 식당에서는 외부음식을 반입하지말고 유대인 종교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을 요구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지 리]

북위 29도30분부터 33도20분, 동경 34도 20분~35도40분에 걸쳐 동부 지중해에 위치해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남북의 길이가420km에 이르고 동서의 폭은20km-116km에 이르고 있다. 또한 북으로는 레바논, 동쪽에 시리아와 요르단,그리고 서편에는 이집트에 면해있어 아랍국가들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남쪽 끝은 "에일랏만(아카바만, 홍해)"에 접해 있어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의 3국 등의 국경이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의 조국으로서 UN으로부터 1948년에 인정된 이스라엘의 면적은 동부 예루살렘을 포함해 요단강 서안지역은 5572제곱km이고 골란고원 1150제곱km, 가자 지구 202제곱km 등 1967년의 6일 전쟁 이후에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있는 곳의 총면적이 6924 평방 km에 이르고 있어 총면적은 27194 평방 km에 이르고 있고 각 국경선은 지금도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편이다. 국토의 모양은 산지에서 평지로의 변화가 굉장히 급하게 이루어 지며 전국을 남쪽의 네게브사막, 해변의 평야지대, 요단강 지구, 그리고 요단강 서변의 산악지방 등의 네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지중해변을 따라서 광활하게 펼쳐지는 해변 평야지대는 단지 북쪽 레바논과의 국경지대인 "로쉬 하니크라(rosh hanigra)"의 바위들과 "하이파"에 있는 "갈멜동굴"등만 돌출되어 있고 다른 부분들은 레바논으로부터 시나이 반도에 이르는 270km의 지역에 넓게 펼쳐져 있다.

                                                                                                          예루살렘 (Jerusalem)

예루살렘은 해발 800m의 산 위에 있는 고원 도시로, 1년 내내 상쾌한 기후가 계속되는 곳이다. BC 100년경 다윗왕이 이곳에 유대 왕국의 수도를 건설한 이래, 유대인에게는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도시로 자리잡았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곳은 유대교는 물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서 온 세계의 순례자들이 몰려든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래 구시가도 이스라엘 판도에 들어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도시다. 2000년이 넘는 옛날과 현대가 잘 조화된 각별한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엷은 베이지색의 돌집에 붉은 기와가 어울리고, 그것이 푸른 하늘과 녹음에 조화되는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예루살렘 평균 기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C)

7

8

10

15

18

21

22

23

22

18

14

9

평균강수(㎜)

139

111

116

17

5

0

0

0

0

10

68

129



겟세마네 (Gethsemane)


겟세마네의 정원은 기독교의 전통에 있어서 가장 영적인 곳이다. 아직 올리브나무가 울창하며,이는 필히 예수가 끌려가던 마지막날 밤을 지켜 도았으리라 믿어진다."Gethsemane"는 히브리어로 "Gat Shemen"즉 올리브 숲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이 지방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겟세마네 동굴


예수가 체포된 곳."동정녀의 무덤"교회에서 멀지 않은 이 동굴은 유다에게 배반당한 예수가 체포된 곳이다. 1950년에 행해진 보수작업에도 불구하고 다른 예루살렘의 고적들 중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다. 전에 농부가 곡식 창고로 사용했으나, 6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이 찾기 시작했다. 동굴안에는 감명적인 돌로 된 지붕과 기둥이 있다. 윗쪽에도 "예수가 제자들 사이에서의 기도하는 모습"과 옆쪽에는 "동정녀 수태와 유다의 키스"라는 그림이 있다.
겟세마네 교회 (Church of Gethsemane)
천장이 유달리 높고 90여 평이나 됨직한 넓은 교회당 안을 들면 전등불로 조명된 모자이크 벽화들이 아름답다. 교회당 전면에는 넓은 바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뒷쪽 벽면에는 예수님이 바위 위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이 모자이크 벽화로 장중하게 그려져 있다. 그 주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교하는 모습도 있고 횃불을 들고 몰려오는 로마 병정들 속에 간교한 생김새를 한눈에 식별 할 수 있는 가롯 유다의 모습도 보인다. 현재의 교회는 1924년 이태리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를로치가 설계, 건축한 것이다. 이 교회는 또한 만국 교회 (Church of All Nations) 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이 교회가 세계 각국 (16개국)의 모금으로 건축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카톨릭의 프랜시스컨 신부회에서 관리 하고 있다.
베드로 교회
계명의 성 베드로 교회 = 교회 이름은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3번,주를 거부했다고 하는 에피소드에 의한 것이다. 현재의 교회는 비잔틴 시대의 바실리카 흔적에 1931년에 세워져,카톨릭에 속하는 성모 피승천 수도회가 소유하게 되었다. 여기에 제사장 가야바의 집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찌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확실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또 A.D. 1세기의 아름다운 석단의 길 마카베아 계단이 발견되었다. 이 길은 시온산에서 기드론 계곡을 잇고 있다.
주기도문 교회 [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주기도문 교회는 예루살렘 올리브산(Mount of Olives)에 위치한 예수승천교회 근처에 위치해 있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가 지목한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기 위하여 첫 번째 기독교 로마 황제가 세운 4개의 교회 중 하나이다. 비잔틴 시대에는 올리브산 공회당(Basilica of Eleona)라고 불렸으며, 현재 교회 건물 동쪽 지하 동굴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준 장소(누가복음 11:2-4)를 기념하는 교회터가 남아있다. 현재 교회의 이름은 주기도문의 라틴어 시작 부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Pater Noster”는 곧 “우리 아버지”를 의미한다.
통곡의 벽
유대 민족의 신앙의 상징, 전세계의 유대인의 순례지이고, 신전 서쪽 벽의 일부 하코텔 아말라비이다. 높이 15m 이 벽이 [통곡의 벽]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긴 유랑시대에 유대인들은 해마다 한번씩 이곳에 들아와 신전의 파괴를 한탄할 것은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약 2천년의 방랑시대, 세계 어디에 있어도 그들은 귀향의 희망을 재정복하고 유대 민족 통일국가의 꿈의 상징이 되었다.1967년 6월 7일,이 꿈이 실현되고, 이스라엘 병사들이 벽에 고생끝에 겨우 이른 것은 유대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아브의 달 제9일째와 같이 유대 정교가 지정되는 곳에 따라, 벽 앞에 남녀별로 무수한 사람이 모일때도, 또 밤이 깊어서 몇 안되는 사람 그림자가 벽에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도.이 무구한 역사를 지내온 거대한 벽은, 우리들 가슴에 직접 말을 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벽에 관련된 많은 관습의 하나로, 돌과 돌 틈 사이에 청원과 기원을 쓴 편지를 끼워두는 것이 있다.
다윗의 묘
다윗 묘의 거대한 석관다윗의 묘 다윗왕은 40년간의 재위후, 이곳에 안치되었다라고 10세기 이후 믿어지게 되었다(다른 왕족과 함께 오펠에 묘가 있다는 설도 있다.) 십자군은 이곳에 4세기에 세워진 교회의 폐허를 발견하여 재건하였다. 1524년에는 회교도가 이것을 모스크로 전용해서 1948년까지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 교도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다윗별이 그려진 빨간 천으로 덮인 커다란 다윗 계승자 22왕을 상징하는 22개의 은제의 성서를 넣어 둔 경관으로 장식되어 있다.

                                                                                                         
                                                                                                          베들레헴 [Bethlehem]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팔레스타인의 중앙산맥, 사해(死海)까지 계속되는 ‘유다의 광야’의 끝,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연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이며, 예수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동굴 뒤에는 성탄교회(聖誕敎會)가 있다. 역사상으로는 이미 BC 14세기에 등장하며, 그 후 부근의 마을과 광야의 유목민의 교역소로서 발전하였고, 16세기경부터는 올리브재(材)와 진주조개의 가공업도 발달하였다.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지이며,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가 1995년 12월 팔레스타인으로 반환하고 철수하였다.

예수탄생교회 [the Church of the Nativity]
이스라엘 베들레헴 시내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예수탄생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로서 예수의 탄생 장소로 알려진 동굴 위에 지어졌다. A.D.135년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기독교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이 장소에 아도니스 신전을 세웠으나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공인된 이후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이곳을 방문하여 아도니스 신전을 허물고 예수탄생교회를 짓게 했다. 교회는 예루살렘 대주교의 관리 아래 333년에 완성 되었으나 화재로 인해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지금의 교회는 531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완공한 것이다. 614년 페르시아 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했을 때 모든 교회를 파괴하였으나, 전승에 따르면 예수탄생교회만은 벽화에 그려진 동방박사들의 옷이 페르시아 조상의 옷과 일치하여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십자가 모양으로 건축된 예수탄생교회의 규모는 길이 52m, 넓이 24m이며 교회의 출입문의 높이는 1.2m에 불과하다. 이 문은 거룩한 장소에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이곳을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도록 하기 위해서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출입문은 ‘겸손의 문’ 혹은 ‘좁은 문’으로 불린다. 교회 내부에는 다섯 개의 복도와 붉은 석재로 만들어진 네 줄의 기둥이 있다. 나무 바닥 밑에는 비잔틴 시대부터 보존된 모자이크 일부가 남아 있다. 제단 양쪽 계단을 따라 제단 밑으로 내려가면 각 종파가 소유하는 11개의 은제 램프와 예수탄생지점을 표시한 14개의 꼭지점을 가진 은색의 별이 있다.

                                                                                                             
                                                                                                  욥바, 텔아비브 Jaffa, Tel Aviv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요나 1:3)> ,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구약시대에는 솔로몬 왕이 욥바 항구를 통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백향목을 수입하였으며,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에서 배를 탄다. 신약시대에는 베드로가 욥바에서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죽은 것을 다시 살렸으며 피장이 시몬 (Simon the Tanner)의 집에서 오랫동안 머무른다.구약 시대로부터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였던 욥바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롭게 하이파 항구가 발전하면서 서서히 그 기능을 잃는다. 주민들도 비좁은 욥바 시내에서 벗어나서 그 북쪽으로 신시가지를 이루며 옮겨 간다. 신시가지는 '봄의 언덕' 이라는 뜻을 가진 텔아비브라고 새로이 이름지어진다. 텔아비브는 순수한 유태인들의 도시로써 이스라엘 건국 후 급속히 인구가 증가한 도시이다.


므깃도 Megiddo


이스라엘 평야 중에서도 므깃도는 동서남북을 서로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제국들의 군대는 이곳을 통과하여 지나갔고, 가나안 땅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졌던 곳이다. 솔로몬 왕은 므깃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곳을 강화시켰고, 이 지역의 행정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왕상 9:15) 그러나 923년경 애굽의 시삭(Sisak)은 므깃도를 파괴하였고 그 후 아합왕때 이곳은 다시 재건되었다. 요시아왕은 북진하는 애굽 군대를 이곳에서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BC 609) 1917년 영국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깃도였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마겟돈(Amageddon)'은 므깃도 산(Har megiddo)이라는 히브리 말을 희랍어로 옮긴 말이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 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 발굴에서 말의 고삐를 매는 돌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 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 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티베리아스 [Tiberias]


헤브라이어로는 테베리아(Teverya)라고 한다. 갈릴리(티베리아스)호(湖) 서안에 있는 역사적 도시이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지명으로 삼았으며 유대교 4대 성지의 하나이다. 고대에는 유대교의 학문 중심지였다. 해면보다 203m나 낮은 지점에 위치하며 갈릴리 지방의 관광 중심지 겸 피한지(避寒地)이기도 한 이 도시는 2,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십자군·이슬람교도·투르크인 등이 남겨놓은 유적이 많다. 그 중에서도 아랍색(色)이 두드러진다. 현재는 북부지방의 거점도시로 발전하여 구시가지 밖으로 신 시가지가 건설되었다.

베드로 수위권 교회 [The Church of the Primacy of Peter]
오늘날 갈릴리 호(湖) 북서쪽의 타브가(Tabgha)에 위치한 베드로 수위권 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막혀 사망한 뒤 부활하여 사도 베드로에게 나타나 그의 고백을 듣고 지상 사명을 맡겼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세워진 교회이다(요한복음 21:16).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 빵과 생선으로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는 자리를 기념하여 A.D.4세기에 교회가 세워졌었다고 한다(요한복음 21:1-14). 그 후 1263년 이슬람 통치기에 파괴되어 약 700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33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임시 교회가 세워졌고, 1982년에 증축되었다. 검은 현무암 벽돌로 지어진 성당 내부에는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 혹은 Mensa Domini)’으로 불리며 예수가 제자들과 식사를 한 바위로 여겨지는 큰 바위가 보존되어 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 바위 위에 엎드려 "교회의 일치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한다.현재 교회 건물의 남쪽 아래에는 갈릴리 호수가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있으며, 그 중 하나가 교회 내의 ‘그리스도의 식탁’ 바위와 연결되어 있다. 이 돌계단에서 예수가 베드로를 불렀다고 추정한다. 계단 주변에는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뜻으로 돌기둥 12개가 세워져 있었다고 하며, 그 최초의 기록은 808년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흔적만 남아 있다. 교회 앞 정원에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안수하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가 마르띠니의 청동 조각 작품과 교황 바오로 6세의 타브가 방문 기념 모자이크 작품이 있다.
오병이어 교회 [Church of the Multiplication]
막달라의 북쪽에 있는 타브하는 산상수훈의 언덕 기슭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교회는 도로 오른쪽에 있는데, 붉은 벽돌지붕의 에스파냐 양식의 건물이다. 신약성서의 내용 중, 예수가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에 축복을 내려 5,000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수)에게 골고루 나누어 먹이고, 빵 7개를 4,000명에게 먹였다는 기적의 장소를 기념하여 세웠다. 교회는 1936년에 베네딕트수도원으로 수복되었으며, 내부에는 물고기와 빵을 그린 5세기의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팔복교회 [The Church of the Beatitudes]
팔복교회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산상수훈 중에 팔복에 대해 설교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예수의 설교는 성경 마태복음 5-7장,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다. 각각의 기록에 등장하는 장소가 약간 차이는 있으나 갈릴리 호숫가의 언덕이라는 점은 일치한다. 오늘날 팔복산, 혹은 수훈산으로 믿어지는 장소는 갈릴리 호수 북서부 해안으로, 가버나움(Capernaum)과 게네사렛(Gennesaret) 사이에 위치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타브가(Tabgha)에서 약 3km 거리이다(마태복음 14;13-21, 마가복음 6:30-44, 누가복음 9:10-17, 요한복음 6:1-14). 4세기 경 비잔틴 제국에서 팔복을 설교한 장소를 기념하여 교회를 세웠으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다. 오늘날의 팔복교회는 1939년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이탈리아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922-1943 재임)의 지원을 받아 팔복산 정상에 세운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를루치(Antonio Barluzzi, 1884-1960)가 설계했다. 교회의 지붕은 여덟가지 복을 상징하여 팔각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여덟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팔복의 내용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다. 교회 앞뜰의 포석에는 믿음, 자비, 인내, 정의, 사려, 자제를 상징하는 6개 심볼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 교회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방문당시 걸쳤던 망토가 보관되어 있다.
갈릴리 호수 Sea of Galilee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 4:18)>,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선교 활동의 중심지 였다. 제자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베드로가 살던 집도 이곳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 마을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들판도 바로 갈릴리 호수의 북쪽 연안이었으며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이곳 언덕 위에서 였다. 믿음이 부족했던 베드로가 풍랑 속에 빠진 것도 이 갈릴리 호수에서 였다. 해면보다 그 수면이 200m 나 낮은 갈릴리 호수. 평상시에는 잔잔하고 맑으나 때때로 큰 폭풍으로 성난 파도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호수 연안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 이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기름진 옥토를 갖고 있어서 주변 인구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으며 갈릴리 호수의 물은 전 이스라엘 땅의 음료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는 생명선이 되고 있다. 심지어 남쪽으로 360Km나 떨어져 있는 네게브 사막의 세데보케(Ssede Boque)까지 물을 공급해 준다. 호수에서 처음 시작되는 송수관은 큰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로 크지만 점차 가늘어 지면서 흡사 사람 몸의 혈관처럼 이리 저리 연결되어 전 국토를 적셔 주는 것이다.

                                                                                                                 
                                                                                                              가나 [Cana]

예수가 최초로 기적을 행한 곳이다. 예수가 어머니,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갔는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돌항아리 6개의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함께 마셨고 그 이후로 제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신약성서 《요한 복음》 2장 1~11절에 나온다. 이 기적은, 예수가 광야에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도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14세기 무렵부터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나사렛 [Nazareth]


예루살렘 북쪽 91km, 갈릴리호(湖)에서 남서쪽으로 19km, 가나에서 남쪽으로 13km 지점에 위치한다. 해발 375m의 고지에 위치하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로 토질은 모래땅이다. 구약성서에는 기록이 없으나 신약성서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으로, 예수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 갔다가 돌아와 30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 백성들이 예수를 미워하여 벼랑에서 밀어냈다고 하는 높이 10m에 이르는 절벽이 있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렸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수태고지 교회', 요셉이 목수일을 하던 집터 위에 세워진 '성 요셉교회'등 예수에 관한 많은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주민 대부분은 아랍인(人)으로, 성지순례를 위한 관광객 상대의 상인들이 많다. 전체인구의 60%가 아랍계 천주교인이다. 도시 주변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아랍인의 거주지구를 둘러싸듯이 세워져 있어서, 이스라엘 국내의 복잡한 아랍민족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쿰란 (QUMRAN), 마사다(MASADA), 사해 [死海, Dead Sea ]

끊이지 않는 전쟁, 고난과 역경의 역사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는 남부 지역의 유명 관광지 쿰란(Qumran)과 마사다(Masada) 그리고 사해로의 여행은 그곳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자연을 감동 속에 느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세계 4대 문명 중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와 접해 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가 바로 그러하듯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패권을 가진 자에 종속될 수밖에 없던 패자였기에 고난과 역경의 역사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쿰란 (QUMRAN)
이스라엘의 사해 북서쪽에 있는 건조한 평원이다. 쿰란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이스라엘의 65개 국립공원 중 하나다. BC 1세기에 당시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는 영적 순수를 추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서 집단생활을 했는데, A.D.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당시 이곳 역시 파괴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죽기 전 절벽의 동굴에 숨겨 놓았던 고대 성경 사본은 사해문서(the Dead Sea Scrolls)이라 불리며 가장 오래된 성서를 포함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해문서가 2천 년 세월을 고스란히 견디어 낸 것은 바로 건조한 날씨 덕분이라 한다.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쿰란 남쪽 약 4.5㎞ 되는 곳에는 샘물이 솟아나며 해수욕시설과 샤워시설, 피크닉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마사다(MASADA)

장엄하고 아름다운 최후의 항전지, 이스라엘의 사해(死海) 해안에 있는 배 모양의 구릉(丘陵)을 이용한 자연 요새지로 이스라엘 왕국의 파멸, 이스라엘 민족과 로마군과의 전쟁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곳곳에 공격 램프와 같은 로마 포위 흔적이 남아 있다. 메마른 황야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바위 산 위에서 사해(死海)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사다 유적지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꼭대기는 평평한 메사(mesa) 지형 위에 자리잡아 ‘천혜(天惠)의 요새’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난공불락일 것 같은 천연 요새도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 군대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곳은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 저항군들이 마지막까지 로마군에 항전했던 곳이다. 풍부한 물과 곡식을 갖춘 이들은 2년이 넘게 로마군의 포위공격을 견뎌냈으나, 공격용 경사로를 타고 진격해오는 로마군에 의해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 집단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당시 자결한 유대인의 수는 967명이다. 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뒤로 1000년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지고, 이후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게 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을 비감하게 장식한 사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구체적인 장소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마사다 항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자 긍지요, 저항정신의 상징이 되었고, 20세기 중반 현장이 발굴된 뒤에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해발고도 434m인 마사다 유적지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배(船) 모양을 하고 있으며, 평균 너비 120m, 길이 620m, 둘레 1,300m이다. 기원전 2세기경 하스몬가(家)의 지배자가 이곳에 최초로 요새를 만들었고,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기원전 35년에 개축하였다. 20세 중반에야 발굴된 마사다 유적지(아랍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곳을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렀다)에는 주로 헤롯 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로마 초기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왕궁(2채)은 물론 행정청사, 목욕탕, 곡물창고, 성곽과 망루 등이 놀라울 정도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75만ℓ나 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 탱크에 연결된 수로(水路)와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되었다. 더구나 로마군이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을 동원해 만든 공격용 경사로가 그대로 남아 있어 기록에서만 보던 로마 포위 공격의 전형적인 형태를 짐작하게 해준다.


사해 (死海, Dead Sea)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걸쳐 있는 염호(鹽湖)이다. 요르단 강이 흘러드나,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없고 유입량과 같은 량의 증발이 일어난다. 염분은 표면에서 해수의 5배인 200‰정도로 생물이 살지 못하여 사해라는 이름이 붙었다. 표면 면적 810㎢. 최대깊이 378m, 평균깊이 118m. 대함몰지구대에 있기 때문에, 호면은 해면보다 395m 낮아 지표상의 최저점을 기록한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걸쳐 있으며 북으로부터 요르단강이 흘러들지만, 호수의 유출구는 없다. 이 지방은 건조기후이기 때문에 유입수량과 거의 동량의 수분이 증발하여 염분농도가 극히 높아 표면수에서 200‰(해수의 약 5배), 저층수에서는 300‰이다. 따라서 하구 근처 외에는 생물이 거의 살지 않으며, 사해라는 이름도 이에 연유한다.예로부터 높은 염분 때문에 사람 몸이 뜨기 쉬운 것으로 유명하다. 또 이 해수에는 유용광물이 함유되어 있으며, 특히 브롬의 함유량이 많아 보통 해수의 100배나 된다. 그 보급원은 갈릴리호(湖)의 바닥에 있는 지하온천일 것으로 생각되며, 이것이 요르단강에 의해 사해로 운반된다고 한다. 또 브롬의 기원을 고대의 달팽이 퇴적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사해 주변은 고대문명, 특히 초대 그리스도교가 발생·발전한 곳으로 유명하며 구약성서에서도 사해가 ‘소금의 바다(Yam ha-Melah)’ 등의 이름으로 종종 나온다. 서안(西岸)에는 1947년 이후 ‘사해사본(死海寫本)’이 발견된 쿰란 동굴과 로마군이 멸망시킨 유대인의 마사다 성채 유적 등이 있다. 칼리야와 남단의 소돔 등지에서는 호숫물의 염분에서 염화칼륨·브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예리코 [Jericho]

성서 이름은 예리고(여리고)이며, 현지 아랍인들은 아리하라고 한다.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요르단강과 사해(死海)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250m나 낮다. 각종 과실수(특히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로, 예로부터 방향(芳香)의 성읍, 또는 종려나무성이라 불러왔다. 본래 요르단 영토인 예리코는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이 관장하고 있다.구약성서에 의하면 BC 14세기경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예리코성이 함락되었다(여호수아 6장). 신약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시대의 예리코보다 남쪽 6km쯤에 있는 툴룰·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이다. 이 곳은 헤로데스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곳이며,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과 구원(루가 19장)이 이루어진 곳이다. 현재의 예리코는 비잔틴 시대의 터 위에 재건되었으며, 옛 예리코(Old Jericho)는 텔 에스술탄(Tel es-Sultan)으로 20세기 초에 발굴되어 BC 5000년경의 집터[住居地] 유적을 볼 수 있다.


                                                                                               

                                                                               아랍에미레이트 (United Arab Emirates)

‧ 국명 :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
‧ 위치 : 중동(아라비안해, 사우디, 카타르 및 오만과 접경)

‧ 면적 : 83,600 km2(97% 사막지대, 섬 제외)

‧ 수도 : 아부다비(Abu Dhabi)

‧ 인구 : 약 790만명('11년 World Bank)

‧ 민족 : 아랍계, 이란계, 인도계 및 기타

‧ 언어 : 공용어(아랍어) 상용어(영어)

‧ 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80%, 시아파 20%)

‧ 화폐 : 에미리트 디람 (Dirham 1) : 340원 (2021.11)


정식 명칭은 아랍에미리트연합국(UAE)이며, 중동 아라비아반도 동부, 페르시아 만(Persian Gulf)과 면하고 있다. 1971년에 영국이 휴전 토후국과의 모든 조약을 종결함에 따라 1971년 12월 2일, 6개의 에미리트로 구성된 ‘아랍에미리트연합’이 창설되었다. 국토의 총면적은 8만 3600㎢로 한반도의 37% 수준이다. 총인구는 826만 명(2011년 아랍에미리트 통계청 기준)이며 인구의 88.5%가 외국인으로 순수 아랍에미리트인은 10%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수도는 아부다비(Abu Dhabi)이다. 대부분의 국토가 사막인 아랍에미리트의 기후는 고온 건조한 사막기후를 보인다. 현재 연방의 행정구역은 7개의 에미리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도 아부다비(Abu Dhabi)를 비롯하여 두바이(Dubai), 샤르자(Sharjah), 아즈만(Ajman), 움 알-카이와인(Umm Al-Quiwain), 라스 알-카이마(Ras Al-Khaymah), 푸자이라(Fujairah) 등이다. 외교, 국방 등 연방정부 소관 사항 외에 대해서는 각 에미리트별로 관할한다.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연방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대의기구는 연방평의회(40명, 임기 4년)로 의회와 유사한 기능을 담당한다. 연방평의회는 실질적인 입법 권한은 없고 심의 및 자문 기능만을 담당하며 정당 활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부다비 Dubai

아랍에미리트의 토후국 중 하나이자 그 수도인 도시. 아랍에미리트의 토후국들 중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으며, 아랍에미리트 유일의 산유국이다. 아부다비의 오일 머니가 두바이 등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즉, 산유국이라 돈이 많다. 두번째 도시가 두바이. 참고로 아랍에미리트 7개 토후국 면적은 다음과 같은데 거의 아부다비가 독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부다비 67,340㎢  두바이 3,885㎢  샤르자 2,590㎢  라스 알 카이마 1,684㎦  푸자이라 1,165㎢  움 알 쿠와인 777㎦   아지만 259㎢

다른 6개 토후국을 다 합쳐도 아부다비 면적 20%가 안된다. 다만 인구밀도는 토후국들 중에서 가장 낮다. 다만 대다수의 인구가아부다비 섬과 그 인근 및 알 아인에 집중되어 있어 체감 인구밀도는 그렇게 낮지 않다. 이렇게 아랍에미리트의 토후국 중 영토가 가장 넓으면서도 수도 아부다비는 작은 섬 위에 세워져 있다. 서쪽의 어느 나라들과 비슷하다. 육지와는 세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최근엔 인접한 육지에 신시가지가 대규모로 조성되어 확장되고 있다. 아예 2030년에는 아부다비의 센트럴이 내륙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아부다비 펀드는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명하다. 자산 규모가 매우 커서 버크셔 해서웨이보다 더 크다. 아부다비 펀드보다 큰 펀드는 역시 산유국인 노르웨이의 국부펀드밖에 없다. 약 3,000억 ~ 9,000억 달러 사이로 추정되며 중간값에 가까운 6,300억 달러가 많이 쓰이고 있다. 옛부터 걸프의 특산품인 진주가 많이 생산되었고, 18세기까지 내륙의 아랍인들이 특정 기간에만 진주 채취를 위해 낙타에 물을 가득 싣고 찾아오던 섬이었다. 그러던 1793년 섬에서 샘물이 발견되자 알 부 팔라흐 부족은 기존 수도이던 리와 오아시스에서 아부다비로 천도하였다. 그 부족 내의 한 가문 중에 하나가 후에 아랍에미리트를 주도하게 되는 알 나흐얀 왕가이다. 19세기 영국과 보호 조약을 맺고 조용히 살아가던 아부다비는 20세기 들어 진주 가격의 하락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1930년대 석유의 발견에 힘입어 현재의 발전된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Louvre Abu Dhabi)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 세워진 '루브르 아부다비'는 건물 전체가 야자수를 모티브로 한 돔모양의 지붕으로 덮여 시간대에 따라 건물내부로 들어오는 빛이 변화하도록 독특하게 설계 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 등에서 전시물을 대여받는 국가와 국가 간의 2007년 협정에 근거하여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진행되었다. 30년간 박물관 이름과 전시물을 빌리게 됩니다. 준공식에는 양국의 국가원수가 참여하여 성대히 거행될 정도였다. 사막의 바닷가에 떠다니는 섬들 (군도, archipelago) 이 루브르 아부다비의 디자인 컨셉이며 그 위에 오아시스 야자수 잎사귀들로 얼기설기 겹친 것 같이 꾸민 어마어마하게 큰 원형지붕이 더해졌다.아부다비 중심가에서 10분거리인 사디야트 Saadiyat 문화지구에 8개의 대형 박물관 미술관 등이 있거나 건축중이다. ‘뮤지엄시티 를 만드는 대형 문화 국가 프로젝트로 관광개발 투자공사 (TDIC) 가 진행하는데,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아부다비, 노먼 포스터의 자이드 국립박물관, 다다오 안도의 해양박물관, 자하 하디드의 공연예술센터가 설계 또는 공사중 이다.
페라리 월드 (Ferrari World Abu Dhabi)
페라리 월드 아부다비(영어: Ferrari World Abu Dhabi, 아랍어: عالم فيراري)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야스 섬에 위치한 페라리 관련 실내 테마파크이다. 야스 섬의 베이사이드 리조트 종합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이 진행되어 2010년 11월 4일에 오픈했다. 부지는 아부다비 그랑프리가 열리는 야스 마리나 서킷의 제7 코너 (헤어핀 코너) 관람석 맞은 편에 있다. 삼각형의 붉은 지붕은 페라리 GT 카의 보디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이중 곡선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최고 높이는 48 미터이다. 이탈리아 스포츠카의 대명사 페라리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 야스 섬에 스포츠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콘셉트의 놀이 공원 페라리 월드 아부다비(Ferrari World Abu Dhabi)를 개장했다. 포뮬러 원(Formula 1) 그랑프리 레이스가 펼쳐지는 야스 마리나 서킷(Yas Marina Circuit) 옆에 자리한 페라리 월드 아부다비는 세계 최대의 실내 놀이 공원. 사막의 모래 언덕에서 모티브를 딴 날렵한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지붕의 넓이만도 20만㎡를 훌쩍 넘는 대형 사이즈다. 이 어마어마한 놀이 공원에서는 지붕 가운데 원형이 홀 위로 솟아 오르는 지 포스(G-Force)와 페라리의 마라넬로 공장을 재현한 메이드 인 마라넬로(Made in Maranello), 갤러리아 페라리(Galleria Ferrari) 등을 볼 수 있다. 디자인은 영국 건축 회사 베노이(Benoy)가 맡았다.
그랜드모스크 (Sheikh Zayed Mosque)
아랍에미레이트에서 가장큰 모스크이며 2007년 완공된 이슬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브다비의 랜드마크 건축물이다. 그랜드 모스크는 웅장함과 무슬림 제국의 건축적 우수성을 나타내며 디자인 또한 다양한 이슬람 문화를 바탕으로 아랍 에미레이트의 전통, 문화, 역사의 완벽한 상징이 되었다. 그랜드 모스크에는 82개의 돔, 24K 금 샹들리에, 1,000개의 기둥 및 세계 최대의 카펫이 있다. 주기도실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샹들리에가 있으며 샹들리에는 스와로브스키 제품으로 높이는 12.2m, 폭 7m, 무게 12톤으로 가격은 90억원이며 카펫은 1,700평 크기의 1장으로 만들어진 35톤 무게의 핸드메이드 카펫으로 1,000명의 여성이 2년간 제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HH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얀 (Sheikh Zayed bin Sultan Al Nahyan)이 구상한 그랜드 모스크는 평화, 관용, 다양성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아랍 에미레이트의 번영하는 현재와 Trucial States(아랍 에미레이트의 옛 호칭)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연결한다.


                                                                                                                   두 바 이 Dubai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구성하는 7개국 중의 한 나라로, 전에는 트루셜 오만의 구성국 중 하나였다. 두바이는 아랍어(語)로 ‘메뚜기’를 뜻하며, 토후국 중 유일한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여 중계무역지가 되었다. 1969년부터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1971년에는 650만 톤의 원유를 수출하여 새로운 산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석유 수출로 인한 수입이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다른 산유국에 비하여 매장량은 적은 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유무역단지 조성 등에 힘써 물류·항공·관광 인프라를 갖춘 중계무역지로 발전하면서 '중동의 뉴욕'으로 불리게 되었다. 2010년 1월 5일 한국의 삼성물산이 시공사로 참여한 세계 최고층(828m) 빌딩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가 개장하였다.

버즈 알 아랍 (Burj Al Arab)
1994년 착공해 1999년 12월 1일 문을 열었다. 페르시아만 해안으로부터 280m 떨어진 인공 섬 위에 아라비아의 전통 목선인 다우(dhow)의 돛 모양을 형상화해 지었다. 버즈 알 아랍은 아랍의 탑이라는 의미이다. 총 38개 층, 높이 321m로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호텔이다. 밤이면 여러 가지 색상의 외부조명이 30분에 한번씩 바뀌는 장관을 연출한다. 200m 상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알 문타하(Al Muntaha) 레스토랑과 바다 속에 위치한 알 마하라(Al Mahara) 레스토랑은 버즈 알 아랍의 명물이다. 28층에 위치한 헬기 착륙장에서는 타이거 우즈가 골프공을 날리고,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와 안드레 아가시가 비공식 경기를 가져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202개의 객실은 모두 해변을 바라보는 전망에 복층 구조다. 가장 작은 객실이 169㎡, 가장 큰 객실은 780㎡에 이른다. 1박 숙박료가 1천 달러에서 최고 1만5천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호텔 중 하나다.
주메이라 모스크 (Jumeirah Mosque)
두바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모스크로 현대 이슬람 건축의 명작으로 꼽힌다. 1975년에 착공해 1978년 완성되었다. 중세 파티마 왕조 시대 양식에 따라 석재로 만들어진 모스크다. 두 개의 이슬람식 첨탑과 장엄한 돔이 있으며 밤이면 조명을 받은 표면의 부조 작품이 아름답게 빛난다. 모스크 중 드물게 관광객에게 개방되는 곳이다. 두바이에는 많은 모스크가 있지만 대부분 이슬람교도만 출입 가능하며, 이슬람교도라도 종교 의식을 거친 뒤 기도 시간에만 입장이 허용된다. 내부는 화려한 문양의 모자이크와 아랍 문자로 장식되어 있다.
두바이 박물관(Dubai Museum)
생생한 입체 모형과 흥미로운 역사 전시하고 있는 두바이 박물관은 두바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알 파히디 요새(Al Fahidi Fort)에 자리하며 두바이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필수 관광명소이다. 1787년에 건설되어 왕의 군사기지, 방위 부대, 무기고,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이 요새는 셰이크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Sheikh Rashid bin Saeed Al Maktoum) 왕이 재임하던 시기에 복원되었다. 알 파히디 요새는 아랍에미리트가 출범한 1971년에 두바이 박물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박물관에서 두바이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고 석유 발견 이전 시대의 생활상을 살펴볼수 있다. 전시관에는 지역의 전통 가옥, 모스크 사원, 수크 시장, 대추야자 농장, 사막과 해양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저울과 추 등 당시 실제로 사용하던 도구를 관찰하고 아라비아반도의 오랜 진주잡이 역사를 알수있다. 이러한 유물은 기원전 3000년 전의 것으로 박물관은 전시품을 세심하게 보존하고 관리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큰 발전을 이룬 두바이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며 놀라운 변화를 직접 확인할수 있는 두바이 박물관은 두바이 크릭의 남쪽 끝에 위치 하고 있다.

                                                                                                       
                                                                                                       팜 아일랜드 (Palm Islands)


아랍 에미리트에서 페르시아 만 쪽에 건설한 인공섬들. 구성하는 섬들은 팜 주메이라, 팜 제벨 알리, 팜 데이라(데이라 아일랜드)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팜이라는 이름의 유래답게 야자수를 모티브로 하여 디자인되었으며 잎에 해당하는 가로로 뻗은 줄기들에는 개인 소유가 가능한 별장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거대한 원형 섬들은 방파제 역할을 하며 페르시아 만과 두바이 시내를 모두 둘러볼 수 있다는 최고의 조망권으로 인해 호텔들과 해변, 고급 식당들이 주로 들어서 있다. 육지와 다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고, 가운데를 관통하는 줄기 부분에는 별장들로 들어가는 통로 그리고 방파제 역할을 하는 섬으로 들어가기 위한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당연히 개인소유 별장들로 가는 잎과 줄기의 경계선에는 검문게이트가 존재하며 통과하기 위해서는 개인 소유별장이 있다는 증명서와 신분을 알려줘야 하며 혹은 초대로 인하여 왔다고 하면 들어갈 수 있다. 그 외에 바깥에 위치하는 호텔이나 식당으로 가는 것이라면 딱히 검문대상이 아니다.

팜 주메이라
두바이 정부 소유기업인 나킬이 만들었으며 주메이라 지역 해안에 지어져서 이름이 팜 주메이라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팜 아일랜드이며, 현재 공사 진척이 가장 빠른 팜이기도 하다. 바깥쪽 섬 끝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워터파크이자 호텔인 '아틀란티스 더 팜'이 있다. 이 곳이 더 유명한 이유는 해수욕과 워터파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팜 주메이라 모노레일로도 연결되어 있으니 차가 없어도 갈 수 있다. 차를 이용할 경우 섬과 섬 사이에 해저 터널을 뚫어놔서 단거리로 이동이 가능하다.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

◈ 수 도 : 타슈켄트
◈ 인 구 : 약 2천 390만명

◈ 면 적 : 447,400㎢

◈ 주요도시 : Tashkent(타슈켄트:211만명), Samarkant(사마르칸트:39만명), Bukhara(부하라:23만명)

◈ 주요민족 : 우즈벡인(68.7%), 러시아인(10%), 카자흐인(4.0%), 타지크인(3.9%)

◈ 주요언어 : 우즈벡어, 러시아어

◈ 종 교 : 회교(수니파)

◈ 화페단위 : 우즈베키스탄 숨 Sum (UZS)  1000 UZS : 110원 (2011.11)


[지리/기후]

면적 447,400㎢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중심부에 동서로 길게 자리잡고있는 나라이다. 국토는 남북간의 거리가 925Km, 동서간은 1400km이며 면적은 약 447,400㎢ 로 이 면적은 우리나 라 남북한을 합친 면적의 약 두배이다. 위도상으로는 우리나라보다 약간 높아서 만주일대 와 같은 북위40°선에 위치한다. 중앙아시아의 중심부투란분지를 차지한 나라로 국토의 4/5가 평원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강우량의 부족으로 이 평원의 중북부는 구소련에서 두 번재로 큰 키질쿰 사막으로 되어있다. 동쪽 국경 지대 5분의 1은 산악지방으로서 동북부 쪽은 텐샨 산맥의 산자락에, 서남부 쪽은 파미르 고원에 부분적으로 걸쳐있다. 이 산악 고지 대중 높은 곳은 해발 4,000m 가넘는 고지대들인데, 이곳 고지대 산악의 눈 녹은 물과 지하수로 인하여 관개사업이 전개되어 비가 없는 사막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면화 생산국이 되었다.대륙성기후 우즈베키스탄의 기후는 전형적인 사막형 대륙성 기후로서, 평균 기온이 7월에는 섭씨 영상40∼46°, 1월에는 영하 6°정도이다. 습도가 매우 낮으며, 일교차가 심하여 한 여 름에도 밤에는 서늘하다. 그 대신 연간 일조시간 2,700∼3,130 시간으로 맑은날이 300일이상 계속된다. 우리나라 서울의 일조 시간이 2,170시간인데 비하면, 엄청난 일사량인 것이다. 비는겨울에 소량 내릴 뿐이므로 우리나라에 비하면 연중 건조한 편이다. 4계절 이 뚜렷하지만 겨울이 아주 짧으며,봄은 긴 편이고, 여름이 뜨겁고, 가을은 온화한 것이 우리나라와의 차이이다.

[사회/문화]

1994년 통계로 우즈베키스탄의 인구는 3,254만명이다. 우즈베키스탄은 100여개가 넘는 민 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호가 말해주듯이 우즈베 키스탄은 우즈벡人이 71.4%로서 다수를 차지한다. 그 밖에는 모두가 소수 민족인데, 러시아 人(8%), 타지크인(4%), 칼라칼파크人(2%), 키르키츠, 카자크, 투르크멘人을 합해 5%, 타타르 人(4.1%), 터키人(4.7%), 고려人(1%)등이 있다. 구 소련 시절에는 우즈벡어와 러시아어가 공용어였다. 그러나 1991년 독립 이후, 우즈벡어만 공용어로 인정된다. 하지만 주요 호텔이나 관광서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할 때는 주로 러시아어를쓴다. 회교(수니파).우즈벡은 특정 종교를 국교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체 인구중 약 90%가 이슬람 교도이 며 그중 약 70%는수니파, 20%는 시아파 교도이다. 온건한 수니파가 압도적이다보니 터어 키의 세속적 신앙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우즈벡 정부는 과격한 시아파 원리주의가 확 산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타쉬켄트 (Tashkent)

타슈켄트는 '돌의 도시'라는 의미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며 중앙 아시아 최대의 도시로서 교육과 학술, 예술, 과학, 공업, 교통의 중심지로 현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기원전 2세기까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무구한 역사를 가진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타슈켄트의 기원은 기원 천년간의 태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1세기에 "돌의 도시"라는 의미의 도시명을 갖게 됨으로서 근대 수도로써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는 아득한 옛날 대상이 황래하던 실크로드의 정취가 남아 있는 구시가지와 복잡한 변화의 과정과 평화로움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시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슬람교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다.현재 인구 211만명(1997년 현재)의 타슈켄트는 치르치크강(Chirchiq River)부근, 목화와 과실나무가 잘 자라는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 문화의 중심이면서 공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중앙아시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또한, 도서관과 우즈벡과학대학과 수많은 교육기관이 자리잡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달리고 있는 근대도시가 되었다.

나보이극장
정식 명칭은 '알리샤 나보이 오페라 발레 극장(Arisher Navoi Opera and Ballet Theatre)'이다. 타쉬켄트에 머문다면 꼭 한번은 이곳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오페라나 발레를 감상하자. 나보이 극장의 내부 장식은 매우 훌륭하며 6개의 휴게 로비는 각각 다른 모티브를 기초로 조각되어 있는데, 타쉬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르 가나 테르메스 호라즘 도시들의 각 특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입장권은 대개 $2 이면 살수 있고 공연은 대개 오후 7시에 시작한다.
레기스탄 광장
3개의 메드레세로 둘러싸여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동양 건축물의 집결체로 꼽히고 있다. 메드레세는 중세 이슬람의 신학교를 말하며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의미한다. 메드레세는 신학과 함께 천문학,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등을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레기스탄에서는 과거 왕에 대한 알현식, 공공집회가 열렸다. 이 광장은 15세기 및 17세기에 두개가 더 증축되어 이슬람 종교 건축물인 울르그벡 마드르샤(좌), 시르도르 마드리샤(우), 티라카리 마드리샤(중앙)에 둘러 쌓여 있다. 현재도 레기스탄 광장에서는 매년마다 대통령도 참석하는 ''''빛과 소리의 제전''''을 여는데, 여기서 티무르 제국의 사라진 영화를 볼 수 있다.
비비하님 모스크
비비 하님은 티무르의 8명 아내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다. 비비 하님을 위해 짓도록 했다는 이 모스크는 티무르 사후 3년째 완성됐기 때문에 정작 티무르 자신은 이 장엄한 예술품을 보지 못했다. 현재 과거 파괴된 부분을 재보수하고 복구작업에 들어가 있는데, 재정 지원이 되지 않아서 완공 일자가 늦추어지고 있다.
고려인 시장
우리 나라의 재래식 시장에 해당되는 곳으로 타쉬켄트 시내에만 13군데의 바자르가 있다. 지붕만 있는 노천시장으로 수백 수천 상인들이 저마다 좌판을 벌여놓고 손님을 부른다. 이곳은 삶의 향취가 물씬 풍겨나는 대단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곳이다. 특히 꾸일루크 바자르는 고려인 상인들이 가장 많은 곳으로 김치나 고추가루 등을 살 수 있어서 한국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끄는 곳이다.

김병화 농장


<김병화>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다. 신한촌이 극동지역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면, 강제이주 직후 중앙아시아지역 한인사회의 등대역할을 했던 곳 중의 하나가 <김병화>콜호즈(농장)(<북극성>농장)이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프카지구의 리포프카마을에 <김병화>농장의 시초인 <북극성>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이주로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주 중치르칙구역에 자리를 잡은 <북극성>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1940년 김병화가 농장 대표로 선출되며 시작되었다.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한 <북극성>농장은 2차대전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고,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50년 시기에는 1헥타르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그 결과 1948년에는 <북극성>농장에 대한 소식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 <북극성>농장은 재정적으로 빈곤한 타민족 농장들과 통합되며 다민족 대형복합농장으로 개편되었다. 농장대표인 김병화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당국은 <북극성>농장의 높은 식량생산성과 김병화의 탁월한 지도력을 높게 평가하여 1948년, 1951년 두 차례에 걸쳐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내렸다. <북극성>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섰다. 소련 최고위원회는 <북극성>농장에 1971년 노동붉은훈장을, 이듬해에는 소연방 50주년 기념훈장을 수여했다. 인구 또한 1980년에는 9,973명에 달할 정도로 <북극성>농장은 모든 부문에서 최고를 달렸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농장의 대표인 김병화가 사망했다. <북극성>농장은 우즈벡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농장으로 개칭되었다. 가상체험관에서는 이러한 <김병화>농장의 주요 건물들과 들판을 통해서 농업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국립 역사박물관 (Исторический Музей)

솨라프 라쉬도프 거리 3 = 리 메르디안 호텔 옆, 무스따낄릭 광장 앞, 우즈베키스탄의 박물관 중 최대 규모이며, 최고의 볼거리를 자랑한다. 중앙아시아 및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역사, 고고학, 인류학에 관한 다양한 자료 약 20만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1876년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박물관으로써, 1943년 레닌 박물관으로 처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으며, 이후 1992년부터 우즈베키스탄 역사 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각 지방에서 가져온 기둥들이 전시되어있으며,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3층과 4층에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석기시대부터 러시아 침공 직전까지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최대의 볼거리는 데르미즈 근교의 화요즈테파 유적에서 출토된 쿠샨왕조(1~3세기)시대의 불상일 것이다. 온화한 얼굴을 한 부처가 인상적이며 크기는 작지만 최고의 간다라불상으로 일컬어진다. 한국의 불교관련 방송에서 이 불상을 보기 위해 우즈베키스탄까지 촬영을 왔던 경우도 있었다. 4층은 러시아 제국과 이후의 역사,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독립이후 현대의 모습까지 전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특히 독립이후의 전시물을 보면 현재 통용되는 화폐, 우표, 여권, 각종 공장들의 사진 및 미니어처들이 전시되어 있다.



                                                                                                     침간(Чимган)과 차르박(Чарвак)

침간은 천산산맥의 지류로서 타슈켄트시로 부터 약 70km 가량 떨어져 있다.

보통 승용차로 타슈켄트에서 2시간 정도 걸리며, 해발 2,000미터에 나무가 거의 없는 특이한 모습의 준봉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침간산의 정상은 3,309m이다. 한때 황제국의 대관들이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 엘리트들 또한 혁명 후에 병든 노동자들을 위해 여름 휴양지를 지었었다. 그리고 동계스포츠를 좋아하던 러시아인들은 침간의 개발에 최선을 다했다. 훌륭한 산세와 맑고 상쾌한 공기와 날씨 그리고 훌륭한 슬로프는 타슈켄트 시민들에게는 대표적인 휴양지로서, 여름에는 인근한 차르박 호수에 사람들이 몰리지만, 겨울에는 침간의 스키장이 가장 인기있는 휴양지이다. 침간 스키장은 리프트 길이는 약 500m로써, 천연의 설질을 자랑한다. 침간의 스키장은 주말에 가더라도 한국처럼 교통이나 리프트가 붐비지 않기 때문에 스키매니아들에게는 거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스키 장비 렌탈도 가능하며, 스키 교습도 값 싸게 받을 수 있다. 스키 타기에 부담스러운 사람은 침간에서 승마도 쉽게 즐길 수 있다. 리프트를 타면 침간산의 중간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여름의 차르박은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윈드서핑, 제트스키, 바나나 보트 등의 다양한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바다가 없는 우즈벡에서 차르박은 여름 피서지로써 더위를 피해 나온 관광객들로 활기차다.침간산의 고산지대 마을에서는 품질 좋은 꿀을 판매한다. 오염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곳의 꿀은 말 그대로 100% 천연 벌꿀이다.

                                                                                                 
                                                                                                         사마르칸트 (Samarkand)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인 사마르칸트는 2,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아시아 최고(最古)의 도시인 동시에 중앙 아시아의 진주라 불리는 아름다운 지역이다. 유럽과 아시아로 연결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적 요건때문에 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왔다. 현재 사마르칸트는 37만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사마르칸트 주변지역에서 재배되는 농산물 교역의 중심지이고, 도시 어느곳을 둘러봐도 고대 유적과 유물이 가득한 아름다움과 위엄이 느껴지는 멋진 관광지이기도 하다. 사마르칸트를 이야기하면서 티무르 왕조를 빠뜨릴 수 없을 정도로 현재의 사마르칸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티무르 황제가 사마르칸트를 티무르 왕조의 수도로 지정해 뛰어난 건축가들을 비롯한 인력과 자본을 투자해 위엄에 걸맞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푸른색 타일로 지어진 멋진 돔과 모자이크로 처리된 벽이 인상적인 이슬람교 사원과 학교, 무덤 등 사마르칸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여러 명소들을 둘러보며 사마르칸트가 영화를 누렸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아직까지도 길에는 말과 마차들이 달리고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라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유네스코와 WTO는 사마르칸트의 역사와 문화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인식해 관광부흥을 위해 원조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사라르칸트에서는 호텔과 공항, 대중교통, 관광편의시설 등의 설비 투자와 서비스 확대 등의 작업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역 사]

기원전 2세기 중국 실크 상인들이 서양으로 실크를 판매하려고 이용하던 육로들로 인해 실크로드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마르칸트는 유럽과 동양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리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주요 무역도시였다.3,4세기 아프라샤프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마을을 영위하고 생활했을 때부터 이곳은 고대 그리스에 마라칸다라(Marakanda)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도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그 유적이 아프라샤프 언덕에 남아있다. BC 4세기 초에 알렉산더 대왕이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는데, 그로 인해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7세기초 아랍인들의 군대가 침입했고, 그들은 사마르칸트를 바그다드와 중국 사이를 오가는 상단의 교역지로 번영했고,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1220년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사마르칸트는 완전히 파괴되어 번영과 영광의 빛을 잃게 되었다. 14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 왕이 사마르칸트를 티무르 왕조의 수도로 정하면서 다시 한번 찬란한 영광의 빛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티무르 왕이 통치했던 35년 동안 그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서 이름난 건축가들을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여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고, 그의 후계자들 또한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지금 우리가 멋진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마르칸트는 15세기까지 티무르 왕조와 함께 번영을 누렸다.1868년 러시아 군대의 침략으로 러시아의 종속국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0년 타슈켄트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울르그벡 천문대
1428-1429년에 걸쳐 티무르 손자인 울르그벡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그의 사후 내분에 의해 일부분이 붕괴되었다. 현재 천문대의 기본 골격과 6각형 천체관측기의 지하 부분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높이 40m의 관측 돔이 있었다. 태양, 달, 행성의 고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지구의 위치, 시간을 결정하였으며, 당시 측정한 1년은 실제 기간과 1분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다고 한다. 울르그벡은 티무르의 손자이자 위대한 학자, 천문가, 정치가였다. 특히 그가 이룩한 천문학적인 업적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울르그백이 세웠던 천문대는 20세기 들어 발굴됐는데 당시 페르시아 등지에서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별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를 통해 놀랄 만큼 정밀한 천문관측이 이뤄졌으며 이 성과는 17세기 유럽으로 전파됐다. 현군 울루그벡이 암살당한 이유가 이같은 그의 학문중시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못참는 승려들의 사주를 받은 그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구르에미르 영묘
티무르 왕이 1404년 손자(마흐무트 술탄)의 전사를 추도하기 위해 지은 청색의 중세건축 양식의 사원 건물로서 티무르 일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티무르는 스승을 존중하여 자신의 묘보다 스승의 묘를 더 크게 만들도록 유언하였는데, 이에 따라 구르에미르에서 제일 큰 묘는 티무르 스승의 묘이다. 돔의 하부 벽에는 코란의 문구가 문양화되어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글이 씌여져 있다. 푸른 타일로 화려한 모양이 장식된 돔은 64개의 나무가 내장되어 골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로로 무수한 흠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돔의 축조 기술은 티무르 시대에 창조되었으며 사마르칸트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묘의 내부에는 티무르 자신과 아들, 손자 및 스승과 당시 지도자들의 석관이 있다. 티무르의 묘는 연옥으로 만들어졌으며 흑녹색을 띄고 있다. 유해의 머리는 모두 메카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유해들은 돔의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1941년 학자들이 이 무덤들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티무르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불구가 됐고 울루그벡은 목이 잘려 암살당했다는 사실이 유해를 통해 증명됐다
레기스탄 광장 (Ансамбль Регистан)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뜻으로 옛날에 모래로 뒤덮힌 사막이었다고 한다. 공공의 광장으로 왕의 알현식, 공공집회, 죄인의 처형 등이 행해졌다. 티무르 시대에는 대규모 노천시장이 있었으며, 그의 후손인 울루그벡 시대에 처음으로 메드레세가 세워졌으며 메드레세의 맞은편에 하나카가 있었다. 광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은 그후 샤이바니 왕조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다른 2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이다. 3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써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후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다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아니고, 노천시장도 아닌 관광지로써 제역할을 하고 있다. 광장은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 울루그벡 메드레세, 중간이 틸라카리 메드레세, 오른쪽이 쉬르도르 메드레세이다. 현재 광장은 명절이나 기념일 때 대규모 콘서트나 행사가 열리기도 해서 무대와 좌석들이 설치되어 있다. 우즈베키스탄 화폐 50숨짜리 지폐에 나온다.
사마르칸트 비비하님 모스크 (Мечеть Биби-Ханым)
타키가 위치한 사거리에서 일명 ‘사마르칸트의 브로드웨이’로 불리는 길로 약 100m쯤 걸어서 내려가면 좌측으로 중앙아시아 최대규모의 모스크인 ‘비비하님 모스크’를 볼 수 있다. '비비하님’은 8명의 왕비 중 아미르 티무르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로 그녀의 이름을 딴 모스크이다. 현재는 수리가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예전의 거대했던 위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스크의 넓이는 가로x세로가 100m가 훨씬 넘어 축구장 이상의 넓이였으며, 예전에는 입구 아치의 옆에 80m높이의 어마어마한 미나레트가 있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푸른 지붕의 큰 모스크와 작은 모스크가 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코란을 올려놓았던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는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벡이 몽골에서 직접 가져왔으며, 현재 코란이 없음에도 현지인들 사이에는 인기가 대단하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면서 받침대 주위를 돌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기도를 하면서 받침대 주위를 도는 젊은 남녀들을 볼 수 있다.